기차는 떠나 간다 -김은숙 1994
우리 하나 밖에 없는 고모는 한국 침례교 초기 순교자들 이신 동아기독교의 김영국감로의 며느리였다.
김영국감로 김영진목사 형제가 공산도당들에게 탈피되어 순교 할때는 아직 중국이 공산화 되지 않은 30년대 였다.
하지만, 만주 용정 해란강 일송정 밑 우리 한국 침례교의 성지 용신촌 교회에 공산당들이 돌아왔을 때는 중국이 완전 공산화 된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된 후이다.
여기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신 분은 고모 한분이엇다.
순교자 김영국감로의 아들인 고모부는 사망하시고 29살에 과부가 되신 고모는 이제 대여살 밖에 안된 2아들을 일송정 고개로 피신을 시키고 교인들은 교회 앞마당에 끌려 나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침을 뱉고 교회를 떠나야만 햇다.
고모는 홀로 남아 고난을 당했고 심한 구타 사망했다고 판단한 공산당원들은 고모를 가마니에 말아 치워 놓고 갔다.
당신 5살 정도였다는 둘째아들 김중헌 목사는 그 광경을 모두 기억하고 있엇다.
1994년 우리가 이동원목사가 있던 워싱톤 지구촌교회, 당시 제일침례교회에 방문 햇을 당신 머리가 좋은 이동원 목사는 용정에서 왓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김영국, 김영진 김영관 목사의 후손인가를 물었고 그날 주일 저녁 예배에 간증을 부탁햇다.
주일 저녁 간증시간에 이동원 목사가 질문하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고모는 우리 침례교 초기 브레인이었고 워싱톤한인봉사센터를 설립 하신 한태경목사의 표현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간증했는데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이동원 목사의 질문에 교인들에게 섭섭했다고 대답했다.
젊어서 과부가 되시고 친정식구들 하나 없이 깊은 산속 해란강가에서 홀로 2아들과 손주들을 키우신 고모가 50년만에 오빠 조카들을 만나고 미국을 방문한 1994년 용정으로 돌아가시기 전 친손주들도 찬송가 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평소에는 거의 들어 보지 못했을 슬픈노래를 녹음해 주시고 가셨다.
‘기차는 떠나 갑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우리 큰딸들도 계시는 동안 돌바주신 고모와 둘째 아들 중헌형님은 그 후에 다시 뵙지 못했다.
그리고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에서 간증한 그날 이동원 목사는 교회 이름을 당시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던 한인제일침례교회에서 지구촌교회로 이름을 바꾸자고 공청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