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 금요일 흐림
나의 이야기
2008-02-09 04:57:00
벌써 금요일,
별로 한일도 없는데 벌써 일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사실 어제 오늘 아침 일을 가고 오면서 밴안에서 부모님 생각이 났다.
‘참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나그네’의 삶을 사시다 가신 분들에게 감사한 생각이 났다.
ㅎㅎ 남들(여편네?)은 내가 부친을 안 닮았다고 비양거리지만,
난 부친을 꼭 닮았다!!
생긴것도 그렇고 맘 약한것도 그렇고…ㅋㅋ
더욱 감사한 것은 아무리 맘이 약해도 절대로 신앙만은 흔들리지 않으신 것이다.
당신께서는 세상의 모든 손실을 감당하셨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타협’이라는 단어를 나의 뇌리에 박어준 사람은 옥수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여자를 만나기도 어색했던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그녀는 놀랍게도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그녀는 놀랍게도 ‘반말’로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뭔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겠노라’식의 표현이 있었다.
뭘 타협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순수하게 살겠노라는 이야기인것으로 이해가 된다.
어찌보면, 현실적으로 처음 사랑한 여인이었는데 왜 한번도 데이트도 못하고, 언제가 여행을 가려던 계획이 이뤄지지 않았나 알수가 없다.
신의 계획이었나?
기독신앙도 모르고 자랐지만, 신앙좋은 대기업 지점장에게 시십가서 신앙그룹의 멘토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니…
‘신의 역사’가 놀라울 따름이다. 큰누이네와 가깝게 지내고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누이네를 잘 섬긴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여간, 부친을 생각하면서 감사했다.
부모님을 같이 ‘앗살하게?’ 신을 섬기지 못하지만, 항상 신을 먼저 생각할수 있는 믿음을 주신것이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떠오른 것은 할머니이다.
그래서 오늘 일기의 제목은 ‘나의 친할머니’, ‘두분의 할머니’ ‘할머니 최병묵’등이다.
제목 :나의 할머니
나에게는 할머니가 두분계시다.
물론 뵌적은 없었지만…
한분은 청주 한씨이시고 다른 한분은 아버님 3형제를 키워주신 최병묵 할머니이시다.
한씨 할머니는 왜 이름이 없으신지 알수가 없다.
친가인 갈엽형네 족보에도 이름이 나와있질 않다.
장교장 부인이신 고모할머니도 최고의 교육을 받으신 신여성인데,
왜 우리할머니만 이름이 없는지 알수가 없다.
하여간, 삼촌을 낳고 돌아가셔서인지 부친께서는 친 할머니이신 이 ‘한씨할머니’에 대해 별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가끔, 여쭤보면 최할머니에 대한 감사함만 몇마디 하셨었다.
부친이 돌아가시기전 2주전, 부친과 열흘을 같이 보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셔서, 옛기억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으셨다.
하루는, 물어보았다.
하늘에 가시면 누가 제일 보고싶으신가 하고 어떻게 하실것인지…
물론 예수님 빼고…
사실 나는 ‘모친’에 대해 언급하시길 기대 했다.
헌데, 친모가 아닌 길러주신 최할머니를 언급하셨다.
고집세고 무서운 할아버지때문에 할머니가 불쌍했다는 내용인것 같다.
언제가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이마가 잘 발달되고 삼촌과 부친과는 달리 얼굴이 길지 않은 편이고,
긴 눈썹이 양쪽으로 쳐올라간 것이 장군상에 마치 불교의 어느 문을 지키는 나찰?과 같이 무시무시하게 생기셨다.
부친은 최할머니가 당신과 당신의 4형제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인지,
무서운 할아버지 밑?에서 고생하신 할머니가 불쌍하신것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다.
홀로 전쟁중에 남하하셔서 부산서 병사하신 백부에 대해서도 할아버지를 닮아서 고집때문에 마음의 병이였다고 말씀하시곤했다.
아마 어린 삼촌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갈수 없었을지 모른다.
해서 그나마, 할아버지가 부친하고는 조금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
부친께서는 별로 말이 없으셨지만, 아마도 부친의 어감으로 봐서,
할아버지과 화를 내시고 하시면, 최할머니가 화를 당하시거나 피신?을 하시면 10대?의 부친께서만이 할아버지를 말리거나 도움을 줄수있었던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후, 최할머니가 어찌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일찍 용정으로 나가 양복점을 여신 백부를 따라 부친도 집을 떠나셨다.
사실 그 무서운 할아버지 때문에 부친이 선한 성품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무서운 조부는 부친이 어려서 심하게 앓게되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부친에 대한 조부의 사랑은 조금은 남 달랐는지 모른다.
부친은 이때 후로 한약을 괘짝으로 달여 마셨다하니 그 시골 노투고의 농부로서는 만만치 않은 낭비?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애증의 관계?
이런 고집스럽고 무서운 조부때문에 ‘나그네?’같은 부친은 나에게 ‘항상 감사할수있는 성격’을 물려주신것이 아닐까?
나의 이런점을 가장 가깝게 안사람은 달라스에서 같이 매니저를 하던 미스터안이었던것 같다.
나를 ‘여린’사람이라고 했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지주로 몰린 조부는 ‘북’으로 축줄되셨다는데…
60년대 혁명이후 북조선을 같다온 중헌형이 조부를 뵈고 왔다고 했다.
그때 최할머니가 같이 계셨는지 확실하게 물어보질 못해다.
그리고 당시, 쌀밥을 먹는 집은 할아버지 집밖에 없었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세계최고의 농부가 틀립없다.
그래서 그러신지, 부친은 어디를 가든지 조그마한 가든을 만드셨는데, 가끔 조부가 농사를 잘 지으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볼티모어 노인 아파트에서도 아파트 측이 마련해눈 가든을 하셨는데 봄철에는 땅을 되집어 주는 일들 해드렸다.
그 따뜻한 감정이 가슴에 살아있다. 부친의 농사가 남달리 잘되어서 다른 미국노인들이 시기하기도 햇다.
성애원 살때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지만 농사를 한번도 도와드리지 못한게 참 죄송한 생각이든다.
부친은 농사나 나무가지 치고 운반하는 일들을 한번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좀 시켜주시지(가르쳐?) 않고… 초등학생이였스면 알아서 할수 있는나이였을까? 죄책감에 원망을 하게되기도 한다.
…
최할머니의 조카는 그 유명한 ‘간도20만원사건’의 주역 최봉설이다.
독립운동가로 모친의 이모부 전홍섭과 함께 ‘건국공로훈장’을 받으셨다.
손주인가 아드님이 아직 연길에 생존해 계시다.
최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