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갓 마구 조갑이 아재 2 181014

오마갓 마구 조갑이 아재가 우리 칠산교회 한태경목사님 제자에…2 근디 특등졸업해디아 특증
침례교역사- pic

2018-10-14 11:00:56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전방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남쪽 각 지역에서는 폐허가 된 시설들을 복구하고 민생을 정비하는 데 총력을 다하였다.

교회도 문을 다시 열고 주일 아침에는 이웃 마을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종소리는 지옥에서 풀려나온 나의 허탈하고 파열된 심령에 생명의 신호처럼 들려왔다. 나는 어느 주일날 중학교 동창생 양태영을 따라 이웃 마을 七山浸禮敎會(칠산침례교회)에 나갔다. 그곳에는 중학교 동창 여학생 김동란과 이금자도 있어서 낯설지 않고 쉽게 어울렸다.

한태경 목사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고 집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던 내가 교회에 가서 마음을 달랬다. 얼마 후에 성가대원이 되었고 나는 확실히 교회생활에 마음의 닻을 내렸다. 그때 서울에서 중앙신학교 학장이시던 이호빈 목사가 와서 부흥집회를 하는데 설교 중에 선지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반드시 부르실 것이라는 확신이 마음 속에 박혔다. 그리고 다짐했다. 어떠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기죽지 말자, 그리고 오직 나만의 세계, 나만의 꿈, 나만의 목표를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정신적 자세이고 현실은 나를 외면했다. 중학 2학년 말 시험장에서 퇴장을 당했다. 月謝金(월사금)과 기성회비 4개월분을 미납한 관계로 퇴학처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가족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계속 등교를 하면서 운동장 끝 나무그늘 밑에서 독서를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담임 박종학 선생님이 교직원 회의에서 ‘가정이 구차하여 학비를 못 낸다고 전교 우등생을 퇴학처분해서야 되겠느냐’고 구제방법을 제기했으나 기성회의 규정이 너무 엄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그때 박 선생님은 즉석에서 사표를 낸 후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셨다. 이 소문이 퍼지고 기성회 임원들이 알게 되었다. 다음날 기성회 임원과 교직원 합동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박 선생님을 다시 불러들였다. 만장일치로 내가 졸업할 때까지 학비 면제학생이 됐다. 참으로 특이한 사건이었다.

후일에 내가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 박 선생님은 서울 홍익대학교 교무과장을 하시다가 퇴직하고 집에서 쉬고 계셨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이화여대 약대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등록금을 대납한 일이 있다.

부끄럽고 자랑할 만한 일이 못 되지만 나는 학비를 내지 않고도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특이한 일이 발생했다. 학교 사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우리 반에는 참으로 공부도 잘하고 심성이 착한 윤상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학과 성적이 나와 비슷하였으나 예능과목에서 나에게 떨어져 1등을 못하고 2등은 항상 그 친구 차지였다. 학교 교직원 가운데 한 분이 주장하기를 내가 학비 면제학생이기 때문에 성적 서열에서도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성적에서 1등을 못하고 윤상희가 1등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 결심에 따르기로 했다.

1952년, 드디어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분명히 윤상희가 1등 성적표를 받았다. 나는 성적표를 바로 열어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슬쩍 열어보았다. 그때 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성적표 좌측 상단에 빨간 글씨로 特等(특등)이라고 쓰여 있었다.

졸업식장에 형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기다렸고 선생님들과 아는 사람 몇 분도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안았다. 졸업식에서는 내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었고 교직원들과 학부모들과 재학생들이 모두 울었다. 나의 가슴 속에서는 가난에 대한 恨(한)의 응어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 형편으로는 중학교 졸업이 내 학업의 종착역이었다. 다른 대책이 없었다. 졸업생 중 10여 명이 군산, 강경, 부여, 공주, 대전 등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경우 졸업하자마자 형이 장날 술 한 잔 하고, 앞으로 내가 사용해야 할 농기구를 사왔다. 나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가슴 속에는 나에게도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밤에는 석유 등잔불 밑에서 늦도록 독서에 매진했다. 졸업 후 두 달쯤 되었을 때 역시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한 동창생 유병웅이 찾아왔다. 가출을 하자고 했다. 어느 날 밭에서 풀을 매다 호미를 땅에 콱 박아 놓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길로 유병웅을 찾아갔다. 그와 내가 삼십 리를 걸어서 강경에 갔고 석탄 연기를 뿜어대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대전에 갔다. 평생 처음 타보는 기차였으며 처음 와보는 대도시였다. 밤 9시쯤에 도착해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는 캄캄한 역전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묻고 물어서 보행으로 인동 남쪽 산 밑에 있는‘화림원(고아원)’을 찾아갔다. 중2 때 지리 선생을 하시던 유정식 선생님의 형님이 이 고아원의 원장이셨다. 그리고 유병웅의 작은아버지가 되신다. 원장님은 우리 둘을 반갑게 만나고 보모에게 인계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보모 한 분이 와서 우리들의 젖은 옷을 갈아입게 하고 따뜻한 밀가루 수제비 두 그릇을 가져왔다. 그날 밤 우리는 추접한 냄새가 진동하는 원아들이 머무는 넓은 방 한구석에서 선잠을 잤다.

그때 우리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고아라고 하기에는 좀 어색했다. 약 50명이 넘는 원아들의 형님, 오빠 노릇을 하면서 그들의 학교공부를 도와주기도 하고, 원장님의 일을 거들기도 하고 고아 아닌 고아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가 전쟁 중이라 보급이 불충분했고 제일 힘든 것이 식량 부족이었다.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두세 週(주)가 지나서 원장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유리창이 깨졌는데 종이로 바르고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데 뽑지도 않은 대전 보문고등학교였다. 우리 둘을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셨다.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면서 나는 어정쩡한 고아원 생활을 했고 전쟁고아들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세상의 어두운 뒤안길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푸른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을 지었다.

보문고등학교는 맘에 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 고아원에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첫째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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