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의 3 한인 침례교회들…
침례교역사- pic
2018-03-10 06:47:27
우리 침례교단은 미국 남침례교단과의 깊은 관계 때문에 미국물을 많이 먹었다.
해서 대형교회 강남중앙침례교회 김충기 목사님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총회장님들이 미국으로 이주 하였다.
1980년대 초 메릴랜드의 볼티모아의 외곽도시 그렌버니의 아주 작은 침례교회 베들레헴에서는 늙은 목사와 힘쎈 의사가 쌈을 하고 모두 물러가고 우리식구와 이대를 나온 배전도사와 다리를 절던 이 자매등이 남아 있었다.
그 때 서울 종로침례교회 전도사를 했던 유종구목사가 오기 전 까지
워싱톤 봉사센타 한태경목사님, 남침례교 한인 디렉터 김광수 목사님들이 돌아 가면서 땜빵을 하고 있었는데…
울 오마니는 한국 10대 대형교회의 하나인 강남침례교회 김충기 목사님에게 미국에 오라고 했다.
당연히 안 오지…ㅎㅎ
하지만, 그 때 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천국? 같은 나라에 안 오겠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안 돼었다. ㅎㅎ
그건 당연히 시대적 착오 이였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윗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무지의 소치였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르는…ㅋㅋ
하여간, 결국 김충기 목사님도 서부 워싱톤주 어디에 생활의 터전을 이미 다 마련해 놓고 있기는 했지만…
김충기 목사님은 우리 침례교단에서 처음으로 미국이주를 거부?한 총회장이었다 할것이다.
침례교단은 열악한 환경에 소수약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실 먹고 살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여서 돈많은 미 남침례교단의 선교부는 커다란 도움이자 돈줄이었다.
선교사들과의 깊은 관계는 미국이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사실 어릴적 동화대회등 교단 모임에 가면 목사님 행색이나 수준들이 조금 뒤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ㅎㅎ
하지만, 나는 우리 침례교단의 선배님들의 이런 못습들이 넘 자랑스럽다.
일설에? 초기 선교사들은 담당지역을 나누웠는데, 언더우드등 장로교, 감리교단 선교사들은 조정, 양반들과 손을 잡고 교육기관등 학교와 교회들을 많이 세웠지만,
우리침례교단은 가장 외진곳 충청북도, 경상북도, 울릉도 그리고 함경북도와 만주, 시베리아까지가 그 담당이엇다.
우리 외사촌들이 남아있는 연길 용정용신촌(당시 석정향) 교회에서 1932년 9월 15일 공산도당들에 의해 목사님과 감로님들이 탈피 순교의 순간있기 그 훨씬 전에도 맨몸으로 시베리아까지 간 전도단들이 사할린의 얼음바다에 배가 전복되어 순교하는 일들도 일찍이 있었다.
부산 영안침례교회 박정근 목사의 조부 되시는 예천의 박기양 로목사, 노재천, 신성균 목사님들은 만주 벌판을 걸어서 전도하던 정말 대단한 분들이었다.
교단이 작아서 한국교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한반도의 외지고 버려진 산꼴짝에서 침례교인들의 손에 의해 일어 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 침례교단의 원조 동아기독교의 자랑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침례교인것이 매우 대단히 자랑스럽다.
약간 덜 배우고 순수해 보이는 …ㅎㅎ
우리 침례교단의 거장이신 예천의 박기양 노목사님은 거의 평생 교단회의에는 참석하시지 아니 하였다. 아니 그 이름 조차 올리지 아니 하셨다.
초기 함경도 원산 본부를 지키던 펜위익 공부(카나다인 침례교 첫선교사 조상이 영국 공작이였다고 해서 인지 옛어른들은 그를 공부라 불렀다)의 유산 관리인 3인중 하나이며 서울침례교회를 처음 시작한 안대벽목사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 하여 대한침례교회를 세우시고 박경배목사님이 후임으로, 그리고 충청도 안희묵목사를 그 후임으로 초청했으나 종국에는 안희묵목사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교회는 문을 닫았다.
조효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1958년 침례교단 분렬시 선교사 젊은측에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동아기독교 출신인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한번 찾아볼 일이다.
그리고 많은 교단의 브레인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에 유학등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한태경, 김광택형제, 김용구, 필유일, 김승학, 안병국, 신석태등등이다.
이들은 왜인지는 알수 없으나 워싱톤에서도 최고 좋은 동네 베데스다, 포토맥에서 바로 벗어난 락빌이라는 동네에 정착했다.
베데스다는 미 육군병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몰라고 3-40년전에는 전 미국에서 학군이 가장 좋은 동네이기도 했다.
이는 워싱톤 디시의 서북에 해당하는 동네로 당시 락빌의 와이트 몰은 뉴욕 밑으로는 가장 좋고 비싼 백화점이었다.
그 밑 워싱톤의 남서쪽 버지니아에도 한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이는 나중에 더욱 번창하게 된것 같다.
하여간 이미 5-60년대 정착한 이들은
김광택집사 형제는 볼티모어 매릴랜드주립대 교수로,
연길 한태경목사님은 워싱톤한인봉사센터(실버스프링)을 운영하고 1980도 쯤 연길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김용구 집사님은 치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치공소는 제일 비싸다는 와이트몰 빌딍에 있었고 나중에 온 신석태집사도 치공을 하고 있었고 1981년인가 그 부친되시는 신정호 목사님이 소천 하셨다.
그 후 바로 신석태 서울 침신 교수도 하던 집사님은 목사가 되어 1982-3년 경 일본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 나갔다가
이후 미남침례교 디렉터로 있던 김현칠목사가 세우고 김호식박사(ㅋㅋ 또 달라스 텍사스의 원호식박사라고 쓴다)가 초기 학장으로 틀을 세운 워싱톤침례신학교 학장으로 왔다.
필유일목사님은 볼티모어 첫교회로 알려진 연합교회를 담임을하고 있었고..
안병국목사님은 워싱톤 한인침례 교회에 1960년도 쯤 한국에서 초청되어 와서 물러나 있었는데
80년대 초 쯤 침례교단 총회를 준비하면서 더나아가 이것이 세계선교자대회를 조직되고 다시 초교파적으로 세계 선교대회로 발전하여 유명세?를 탓고 한동안 거의 10년?? 세계선교자대회라는 것이 유행해서 해마다 그 대회를 치뤘다.
그리고 그 지역에
워싱톤 한인제일침례교회, 몽고메리한인침례교회, 워싱톤한인침례교회 3교회가 있었는데 아마도 일찍 시작도 했지만 여건상 다른 교단 교회 보다 훨씬 큰 교회로 한인 이민자들의 정신적 기둥역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소풍, 수련회, 부흥회등 모임이 많아서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내막도 많이 알았는데 이제는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것 같다.
각교회를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워싱톤교회에는 김원기목사가 젊은 나이에 있었고 90년도 쯤에는 서울대 이상훈 목사가 있었던 것 같다.
실버스프링 워싱톤한인 제일침례교회에는 김현칠목사가 떠난 후
이동원 목사가 오고 90년도 초 지구촌교회로 이름을 바꾼다.
이때 우연히 중공에서 용정 용신촌교회 육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사촌 김중헌목사와 고모가 오셔서 방문 중이었는데
머리 좋은 이동원 목사는 우리 사촌이 침례교 3대 감목 김영관목사 후손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날 저녁 예배 시간에 이동원 목사가 처음으로 교회 개명을 언급하며 교인들 의견을 물었는데 방문자인 나는 시건방지게 나서서 불가하다고 우겼다 ㅋㅋ
하여간, 미국 한인 역사에 이 3 침례교회는 커다란 존족을 남겼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