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숭의동 침례교 성애원 50년대 사진 161009

인천 숭의동 침례교 성애원 50년대 사진
인천숭의동20번지-성애원숭의침례pic

2016-10-09 11:03:50

철이 들고 나이가 들면서…

마구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아니 이미 한 나라는 다 잡혀먹은 것 같은 이 패악한 세대에…

옛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한경직목사나 김수환추기경같은 유명했던 분들도 많았지만 우리 침례교단에도 부산영안교회 박정근목사의 조부 돼시는 박기양목사님 같은 분들은 어린 내가 봤을 때도 참 신실하고 존경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독보적이고 교단의 큰 어른들은 아니 셨지만 개인적으로 존경할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

돌아가신지 벌써 10년 20년이 돼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분들이 마지막 까지 제일 가깝게 갖고 계시던 사진첩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알고 있던 것인데도…

그 사진첩의 사진들 사이엔 오랜 동안 잊었던 사진들이 사이 사이 삽입되어 있다.

ㅎㅎ 부모님께서 주님께 돌아가시기전까지 누구를 가장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두말 할 것 없이 제일 귀엽고 이뻤던 막내… ㅎㅎ

손주들의 사진들이 있고…

오마니 사진첩에는 북에 두고온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이모들의 희미해져가고 있는사진들을 현대 디지틀로 당신께서 손수 다시 찍은 것들이 눈에 뛴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베이비들이 두명 있는데,,, 아마도 둘째와 셋째 누이 사이에 유아사망 했다는 형들로 추측이 된다. ㅠㅠ

그리고 55년경부터 59년 미국 남침례교 첫선교사 나요한(John Abernathy)가 미국으로 이한 할때 까지 원장으로 계셨던 인천 숭의동 성애원의 사진들이 많이있다.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어릴적 보았던 사진들이 몇몇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혹 누이들이 가지고 갔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간 오랜동안 보지 못했던 사진들이 거게는 다 부모님들께서 삶의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감개가 무량하다…

50년대 중반 국립? 사회사업자 수업? 수료 기념. 오른쪽 뒷줄 4번째 어깨가 넓고 잘생긴 훈남이 부친 김은섭. 625직후이니 아마도 사진에는 유명 사립재단이나 사회사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성애원에서 가죽 공장 건너 와룡 소주 공장. 그 오른쪽 새로 지어진 신생 주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같은 사진들 보다 나중에 찍은 것으로 생각 된다. 60년대 초???

ㅎㅎ 해서 미국 선교사나 미군들의 성능이 좋은 사진기가 아니고 아는 누구의 사진기로 찍은 것일 것 같다.

확실하게 윗 사진 보다는 훨씬 앞서 찍은 사진인데, 부친이 성애원에 부임하신후 인천숭의침례교회로 사용됐고 오마니가 현 제물포감리교회에기증한 2층창고도 지으시고 우물 옆 밑으로 실외 목욕탕과 빨래터 그리고 2층 대강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축조 하셨는데 그 빨래터가 지어지던 때인 것 같다.

재미있는것은 가죽공장에서 사무실로 쓰이고 인천교대부국의 차중휘 부친이 공장장?으로 근무하시전 빌딩이 아직 천막이고 논밭 건너에 있던 신생주택은 아직 지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2층 대강당 뒤에 있던 높은 언덕. LA 안대벽 목사가 설립한 대한침례교회 후임 박경배 목사님 장남?

가죽공장 저수지 논밭을 건너 수봉산 배밭 주인집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기독교 공동묘지 밑 포도밭 주인집이 바로 앞에 있는 것 처럼 가까이 보인다.

성애원 2층 대강당 뒷편 제일 높은 언덕에서 보이는풍경. 오른쪽 밑에 고아원 대문이 보이고 건물이 가죽공장 그 뒤가 가죽공장과 와룡소주 저수지. 저수지 주위로 뚝과 같이 보이는 것이 주인선(인천 숭의국민학교 앞으로 지나 가던 수인역에서 주안으로 이어지전 화물선로)

이 주인선으로 하루에 1-2번 정도 화물선이 지나가곤 했는데 우리는 언제나 그 화물선 칸수룰 세어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 칼을 만든다고 대못을 침을 뱉어 선로에 올려 놓곤 했는데 한번도 제대로 된적도 없고 어느 정도 납짝꿍이 되어도 실제로 칼이나 쓸만한 도구를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잊혀질만한 때가 되면 큰 대못을 찾아 들고 선로로 가곤 했다.

정면 언덕의 광채나는 흰빌딩은 선인재단의 터가 된 성광학교. 성광학교 밑으로는 중국인 묘지가 있었는데 중국인 묘지는 분봉이 아니고 조그마한 빌딩처럼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 앞이 현재 제물포역인데 아직 제물포 역은 지어지지 않고 주인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곳데 간이역이 있었다.

앞에 보이는 전선철탑 왼쪽이 변전소 철조망 담.

저 성광학교 왼쪽으로 역시 학교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성장해서는 다른 건물들이 가려서 본 기억이 없는데 저렇게 큰 건물은 박문여고와 동인천고등학교 뿐일 것이다.

박문여고가 뒷쪽에 있고 남향이 아닐 것 같으니 결국 동인천 중고등학교가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전기철탑 뒤로 인천숭의 국민학교 끝 돌담 뒤로 남중고 동쪽으로 넓은 밭이 있고 그 가운데 아주 좋은 개들을 키우던 종자씨를 팔던 중국사람 집이 있었는데 사진에는 그 중국사람 집으로 보이는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정가운데 큰집 왼쪽 작은 집일런지 모른다.

70년도인가 경인국도에서 철길까지 큰도로가 났을때

그전에 있던 자동차운전 교습소가 반토막이 나고 큰 흰집이 큰길 변에 서게되고

경인운전교습소 끝에 파출소가 들어 서고 저 작은 집은 그냥 있었던거 같은데…

중국인 집은 왠일인지 교습소가 들어올때 짤린것 같기도하다.

세째눈이가 운전배운다고 다니다가 그 중국집에서 강아지를 얻어온적이 있는데….

그리고 어느 인천이야기를 쓴 사람이 여기에 인천시내 똥이 다모이는 분료수거장이 있었다하고 47년생인 형도 있다고 우기는데 아무리 봐도 분료수거장이 있을만한 데가 없다.

와룡저수지 왼쪽으로 주인선 철길을 넘어 좁은 논길을 따라 가다 보면 경인국도 바로 전에는 미나리 밥이 있었고 그 전의 집은 나중 경기자동차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같이 합쳐졌고 그 왼쪽 조그마한 구조물이 중국사람 집이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집은 경기자동차운전훈련장 밖에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그 뒤로는 모두 밭이었고 그 북쪽으로 사진에 보이는 것 처럼 경인국도 까지 집들이 보인다.

이 사이로 똥소구루마가 다닐만한 길도 없었는데 어디로 똥을 날랐다고 하는 것인지…

아이고 누구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쫌 해주소…

다만 기억나는 것은 주안 개건너로 가기전에 아직 염전들이 있던 곳을 가기전 주안 고아원(향진원???) 뒤로 똥통으로 사용됐을 것 같은 콩크리트 구조물들이 있었는데 형이나 그 양반들이 이걸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아원 동쪽 앞에도 제법 큰 군락을 이르고 살았는데 이때만 해도 집들이 많지 않다. 앞에 보이는 왼쪽 집과 가죽공장 담사이로 골목같은 좁은 길이 있어서 이 길로 가죽공장 압에 있던 조그만 저수지 논밭으로 나갈수 있다.

와룡저수지에서 수봉산 고개로 넘아가는 곳 까지 논밭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작은 저수지가 2개 더 있었다. 안쪽으로는 연꽃 저수지가 있어서 가을인가 가을이 끝날때 쯤이면 물을 빼고 연뿌리를 캘 때면, 추수때 고아원에서 밤나무를 따거나 할 때 같이 산9번지로 가는 모든 사람들이 들러 연뿌리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모여들곤 했다 우리도 버린 조그만 연뿌리나 뿌러진 조각들을 주어 맛이라도 보곤 하던 기억이 난다. ㅎㅎ

저 집에는 무당역을 하는 것은 본적이 없는데 무당이었다고 하는 분이 살았고 애들이 나보다 한살 어린 친구가 살았는데 많이 놀지는 아니했지만 아주 착하고 성실한 아이들 이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아니하지만 그 친구는 성실해서 나중에 철도 고등학교에 간것을 알고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성실한 나라였다면 아마 철도청장쯤 하고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집 오른 쪽으로 거의 우리가 살던 고아원와 정면에 놓인 집에 백씨인지 나보다 한살 많은 아이가 살았다 나중에 가게도 했는데 계속했던게 아니고 했다 안했다 한것 같다.ㅎㅎ 그리고 그 안쪽에는 항상 인상을 쓰고 경찰서에서 일을 한다는 바싹마른 ‘깜상’이라는 형이 살고 있었다.

노모에게 용돈을 달라고 땡깡을 부렸다나 어쨌다나…

ㅎㅎ 쓸쓸하기 그지 없는 시절 오른쪽 고아원 앞 동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미국사람들이 와서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것 같다. ㅎㅎ

사실 나는 너무 어려서 직접 고아원 빨래를 말리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가 살던 1숙사 뒷편 빨래터라고 부르던곳. 빨래를 하는 곳아 아니라 빨래 말리던 곳인데 그냥 줄여서 빨래터라고 불렀던 것 같다.

우리나 고아원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 빨래를 말리곤 했다.

ㅎㅎ 고아원 아이들이 적씬 이불들을 말리고 있다. ㅎㅎ 지난밤 내가 그린 지도도 말라고 있나???

빨래터 뒤편으로 보이는 2층창고가 거의 다 건설되어 기와를 기다리고 있다.

성애원 터도 언제부터 있던 묘지들인지는 모르지만 묘지 터여서, 언젠가 저 빨래터 왼쪽 끝이 장마로 흐므러져서 관이 들어 있던 공간들이 몇 들어난 적이 있다. 여기서 아주 조그만 술병 같은 자기를 찾아낸 적이 있는데…

이게 몇억짜리 고려 자기이었을 지도 오르는데… 그냥 꽃가지 하나 정도 꽂아넣는 꽃병으로 얼마간 쓴 기억이 난다….ㅎㅎ

그 꽃병 어디 갔지??? 아이고.. 갖고 있었으면 몇 억??? 아이고 아까워…ㅎㅎ

황두섭형네가 살던 2기숙사 끝방과 오른쪽 장경순전도사네가 살던 사랑방 독채.

웃물이 있었던 기억은 나지만 물이 안나왔는지 패쇄했고 우물 왼쪽으로는 담이 다 무너져서 동네 사람들이 길로 다니지 않고 고아원 정문으로 들어와서 저리로 다니곤 했다.

담넘어 밭 건너 길가 집에는 무당아줌마가 살고 있었고 독자였는지 나보다 한살 많은 악동이 살았다.

성명중이 형, 정기등 나보다 1살 많던 아이들이 꽤 있었다.

ㅎㅎ 참 다시 봐도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다.

산구번지로 오르는 수봉산 고개길.

저길로 모든 인천공고생들이 등교를 했고 거의 모든 고아원 형들도 그 학교를 다녔다.

그 고개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왼쪽으로는 수봉산 정상으로 오른쪽으로 범바위, 호랑이 바위를 지나 인천 피난역사의 한장을 장식한 용현감리교회와 빈촌이 있어던 용현동으로 간다.

당시는 그 범바위 또는 호랑이 바위로 불렸을 것같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정확히 뭐라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봉산 활터가 있던 절로 넘어가던 고갯길.

배밭 오른쪽으로 포도밭이고 그 위로 기독교 묘지.

산 중턱에 빨래터가 있던 약수터.

길 오른쪽으로 산구번지 사람들이 사는 곳 까지 모두 일반묘지터였다.

고개에서 절로 넘어가기 전 오른쪽으로 제법 큰 넙죽바위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수봉산 정상으로가는 길이 있었다.

정상넘어 현재 경인국도에서 올라오는 큰길 쪽으로 당시는 경찰탑이라고 불리던 충열탑이 있었고,

정상은 사실 2중으로 되어 있어서 넙죽바위에서 길을 오르면 엄청넓은 공터가 있고 그 다음 동북쪽으로 더 가서 높은 곳이 정상이었다.

그 전에는 할일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없었던 같고 70년대나 돼서야 일요일이나 돼야 아침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때도 사람들은 수봉산 더 높은 정상은 가지 않고 정상 전의 넓은 터까지 가는 것이 전부였던것 같다.

수봉산은 뭉퉁한 산이라서 정상에 가면 오히려 사방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 넓은 터는 반대편은 보지지 않지만 한쪽 끝으로 가면 정말 산에 오른것 처럼 멀리까지 보였다.

그때 쯤 높은 뭔 탑을 세웠는데 아마도 정상에 세우지를 않고 그 넓은 터와 같은 높이로 산을 깍아서 탑을 세웠던 같다.

자연그대로 두어도 모자랄 판에 왜 산을 깍아서 탑을 세우나 하고 어린마음에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에고…

ㅎㅎ 그러고 보니 저거이…

저거이…

그 유명한 56년도형 Chevy Bel Air 아닌가??? 우와 말로만 듣던…

집들 넘어로 추수를 마친 논밭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 뒤 아직 물이 차 있는 곳이 연꽃 저수지이다.

오늘 차는 56 Chevy Bel Air는 아닌데 뭔 차종인지는 모르겠다. 옆에서 일하는 롼이 말할길 58년도 형이란다.

롼은 평택 캠프 험프리에서 70년대 초반에 근무했다.

해서 헬기가 북쪽에 추락해서 조종사가 포로로 잡힌 일, 미류나무 도끼 만행등을 기억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연꽃저수지는 얼어있다.

와룡저수지나 가죽공장 저수지는 겨울에 썰매를 타고 커서는 스케트장으로 유명했는데 연꽃 저수지에서는 썰매질을 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연꽃으로 인해 썰매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일 것 같다.

나중에는 패쇄해서 나는 저 문을 사용한 기억이 없지만 고아원 빌딩 정면에서 앞동네 쪽으로 조그마한 쪽문이 나 있는데 그 왼쪽으로는 담을 따라 부친이 심었는지 이탈리아 포플라가 줄지어 있어고 쪽문쪽으로 돼지 우리를 지어서 돼지를 키웠는데 지독한 냄새도 기억이 나지만 형이 중학교 갈때인가 마지막 돼지를 판기억이 나는데…

그 돼지 우리 때문인지 인천교대부국을 다닐때 부자집 아이들이 신기했는지 우리가 돼지키운다고 놀림아닌 놀림을 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돼지 키우지 않는다고 변명?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ㅎㅎ

수봉산 고개로 가는 길.

찝차 뒷부분 넘어로 보이는 각진 집이 뺀질이네. 나중에 가게를 열었다.

그 위로 전봇대 지나 보일것 같은 박찬원이네 가게.

이 찝차는 미군용 찝차랑 다르게 생겨서 뭔 일제 차인가 했더니…

옆에서 일하는 롼이 말하길…

2차세계대전 후 찝차가 없던 영국이 미군 찝차에 힌트를 얻어 만든 영국 찝차 랜드로바란다.

순시리 남편유니가 타고 다닌 다는 그 유명한 고가 수입차…랜드로바… 현재 11월15일경 그 좋은 랜드로바를 남겨두고 잠적을 했으니 얼마나 타고 싶을까??? –순수한 조선 아재들의 생가! ㅋㅋ

그러고 보니 ‘광수생각’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 사이비덜이 옳바른 지식인들을 다 죽여서 이제는 바른생각 바른말을 하는 이들이 없으니…

지식인의 양심이 다시 살아나야 이 민족이 살아날 텐데!!!

우리는 김대중 선상의 ‘행동하는 양심’을 헌 신짝처럼 버렸으니 우짜면 좋노????

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 기를…

ㅎㅎ 참 흥미로운 사진이다.

나무가 풍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봄은 아니 된것 같고…

뭔가 건축재료가 잔뜩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2층창고가 지어지기 전인것 같은데…

가죽 공장 오피스가 반듯하게 지어진 것으로 보면 분명 미국선교사들 사진에서 보이는 천막 오피스시절은 지난것 같다.

와룡소주 오른쪽으로 신생주택이 사진에 안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지어지지 않은 것인지???

신생주택이 지어진 맨 위 첫번째 사진 과 같은 때 찍은 것이거나 그 직전 찍은 것 같다. ㅎㅎ

고아원 남쪽 제2기숙사 위, 2층 대강당 남쪽으로 있던 운동장 동남쪽 끝에 있던 수평대.

동인천역 지하도 앞에서 가게를 하던 서병협형이 수평을 하고 있다.

그 것 참 신기한 일이다.

고아원 사진을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도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수평대가 기억이 난다. ㅎㅎ

가끔 동네 형들이나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형들이 저 수평을 하기 위해 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쓰다보니 우리도 어릴적 만히 했고 중고때 절친 호명석이도 잘하던 운동인데,

저 명칭이 생소하다. 평형대는 아니고 저게 왜 수평하고 관계가 있어서 수평, 수평대라 했을까??

내 가 맞다면 아마도 일제의 잔재??? 흠 수평대라…

뒤에 수봉산 약수터 오른쪽으로 있던 일반공동묘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침례교 박경배 목사님 사모님과 장남?

부친께서 병원복같은 바지를 입고 계신 것을 보면 병상 중이신 모양인데..

고아원 정문에서 2층 창고로 오는 길에 있던 로타리 가운데 깃대가 보이고 관리돼지 못해 막자란 코스모스로 몸을 감추고 계신다.

아마 고아원 패쇄 당신 고아원을 봉쇄한 대전파 사람들과의 몸 싸움으로 부상을 입으시고 계셔서 목사님이 문병을 오신 것 같기도 하고…

고아원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수봉산으로 오르던 약수터 윗쪽으로 벌써 구조물들이 들어산 것이 보이니…

고아원 패쇄 후이거나 60년대 초가 될것 같다.

후덕하신 박목사님 사모님께서는 년전 엘에이에서 돌아 가셨다.

부친 장례 후 목사님께 용돈을 보냈는데 한참 후 편지가 돌아오고 전화도 통화가 되지 않아 연락이 두절 되었는데 아직도 연락처를 받지 못한태 사모님 소천소식만 듣게 되었다 모두 강건하시던 분들인데 목사님도 건강하신지….

제물포 역 뒷편에서 주인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곳에 있던 간이역이 있는 쪽을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 경인철도 앞이 제물포역사 옆으로 있던 커다란 미나리 밭이고 저 집들 사이에도 콩나물 움막집이 있었던 것 같고 경인철도 뒤로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숭의국민학교 앞 다리를 지나 와룡소주 저수지를 돌아 경인국도 철교를 넘어 나오는 주인선이다.

주인선 뒤로 경인 국도에 버스가 달리고 있고…

수봉산 동북쪽으로 움푹 파인곳은 활동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채석장에 옛날 부터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부친이 지으신 제1기숙사 앞 우물 지붕과 그 밑에 야외 목욕탕과 빨래터.

부친이 디자인한 이 빨래터는 우물에서 바로 물을 길어 올려 밑으로 부으면 동글하고 네모난 욕조가 세개 있어서 그 욕조들을 채우고,

다시 그 물들이 넘치면 그 물로 빨래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저 빨래터 모양은 특이해서 어린 무리들의 풍족한 놀이터 였다.

아이들은 가지가지 놀이를 개발?해서 놀곤 했다.

우물 옆에는 세수도 하고 바로 빨래도 할 수 있는 기다란 공동 세면대가 있었다,.

수봉산에는 일반공동묘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왼쪽 하얗게 언 곳은 연꽃저수지…

고아원 북쪽 밭.

그 옆으로 꽃밭 로타리가 있었고 그 끝은 고아원 정대문이 있었고 그 문 서쪽 코너에는 분뇨를 모아두는 커다란 똥통 웅덩이가 있었다.

왼쪽 전선철탑 옆 변전소 담이 보이고 뒤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은 인천 숭의 국민학교. 후에 앞쪽 건물을 증축해서 뒷건물은 안 보이게 된다.

두 건물 오른쪽은 인천 남중고.

오른쪽 숭의 초등학교 지붕 위로 보이는 것은 멀리 숭의 사거리, 숭의동 청과시장, 도원동 도원운동장, 공설운동장을 지나 경인철도를 지나는 도원고개 다리 동쪽 산언덕에 있던 인천 전도관이 선명하게 보인다.

ㅎㅎ 수봉산 정상에서 동북쪽 채석장 쪽으로 충열탑이 건립되고 있다.

이때 건립되었는지 모르는데 왜 누가 가서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건립 중인 것은 확실하다.

경찰탑이라고 불리던 저탑에는 충열탑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건너편은 선인재단 동쪽으로 거대한 인천대학 체육관인가 지어진 곳.

그 너머에는 송림동이나 개건너가 보였을 것 같다.ㅎㅎ

고아원 원두막이 있던 솔밭에서 찍은 변전소 사택.

첫집이 한의사 곽지형이 살던 집. 지형이는 인천교대부국을 같이 다녔는데 입학당시에는 내가 가서 기다렸다가 같이 가곤 했는데 우등생인데다가 전국을 제패한 핸드볼 팀 리드까지 할 정도로 운동도 잘하는 소위 잘 나가는 학생이어서 그런지 언젠가 부터 같이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경기중학에 지원했다가 그 해 뭔 문제에 문제가 생겨 낙방을 했는데 기여코 국민학교 재수를 해서 다음해 기여코 가려했는데 박정희가 중등학교 평등화를 한다고 학교를 없에는 바람에 인천중학으로 진학했다가 고등학교 때에는 고등학교를 평등화하는 바람에 결국 서울로 진출?하지 못했다는데…

교회를 같이 다니던 네비게이토의 스리랑카 선교사 신현승이 또한 저 사택에 살았는데 서울농대에 진학 했지만 어릴 적에는 항상 지형이와 비교를 당했다나 어쨌다나…

지형이는 어찌해서 인지 경희대 한방과를 간 모양인데 아직 한방과가 뜨기 전 일것 같은데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한국최고의 한방과을 갔다는 것도 선경지명이 있었다 할 만하다.

하여간 근래에 와서 인터넷이 발달하여 그의 자취를 찾아보니 내가 사는 이곳에서 가까운 뱅쿠버 카나다에서 한방을 크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곳 교류가 있는 목사들에게 물어보니 신임과 존경을 크게 받고 주의 일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기한 것은 풍경 벌리 규칙적으로 보이는 구조물들이 마치 염전 처럼 보이는데 옛날 옛날 수인선 넘어 바닷가 쪽으로 염전들이 있던 기억은 나는데 고아원 언덕 위에서 수인선 넘어에 있던 염전이 보일 수 있나 의아한 생각이 든다.

멀리 월미도?? 섬과 바다같이 보이는 풍경이 정말 신기해 보인다.

고아원 정상 솔밭에서 더 밖같 쪽에서 변전서 사택 윗쪽을 찍은 사진 인데,,,

변전소 지나서는 바로 주인선 철도가 있고 왼쪽은 숭의동 사거리에서 독쟁이 용현동으로 가는 차도가 그 철길을 넘어 갔는데…

그 차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그 길이 나지 아니한 때 일 수 있는데…

가운데 쯤에 커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인천교대 이전의 인천사범외에는 이렇게 큰 빌딩이 있을 수 없으니 분명할것 같고 아직 서향으로 지어져 있던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아직 없고 인천교대 당시에는 본관 가운데가 뾰죽 지붕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평평한 것으로 보아 건물이 개조되기 전이고 본관 오른쪽 동쪽 언덕에 기다란 실험실과 부속 건물 들이 이미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인천 교대 서쪽에는 뭔 제철소던지 커대한 굴뚝을 가지 공장 건물이 있었는데 그 회사 역시 아직 안 보이고 있다.

그게 뭔 회사 였나??? 교대부국에서 보면 바로 앞에 굴뚝에 커다란 글씨가 선명한 회사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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