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례교의 어제와 오늘170410

남침례교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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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11:17:43

남침례교의 어제와 오늘

남침례교는 2011년 기준 45,764개 회원교회, 1천6백만여명의 성도들이 소속된 세계 최대의 개신교단이다. 616만명이 주일예배에 참가하고 있으며 한 해 333,341명을 침례를 받았다. 남침례교 1만여명의 국내외 선교사들이 153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단일교단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다.

1845년 설립당시 작은 몸부림에 불과했던 남침례교는 후퇴없는 성장을 계속해왔다. 남침례교는 가치관의 혼돈속에 성경중심 신앙체계를 확고히 하고 복음전파를 교단의 최우선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매년 1,400여교회가 미주지역에 개척되고, 34만여명이 침례를 받는다. 해외에서도 2만4천여교회가 개척되었고 50여만명이 침례를 받는다.

미국에서의 침례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찾아온 청교도들이 이민과 더불어 1620년 시작됐다. 1639년 로드 아일랜드에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으며, 남부지역에는 1696년 사우스 캐롤리나에 침례교회가 처음 세워졌다. 1707년에는 필라지역에 5교회가 협력해 미주 첫 지방회가 설립된다.

남침례교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큰교단으로 부상한다. 1845년 5월 8일, 293명의 대표가 조지아주에 모여 ‘남침례교’라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한다. 윌리엄 블라인 존슨이 초대 대표가 됐으며 교단의 기틀을 세우는데 기여했다. 교단설립 당시 침례교회의 숫자는 4,100여개, 회원수는 36만여명에 불과했으나 1950년대에 이르러 2만7천여교회 700만회원으로 급성장했으며, 20세기 후반에는 세계최대의 개신교단이 되었다.

남침례교의 한인교회 모임 미주한인침례교

다른 미국 주류교단같이 남침례교안에는 한인교회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으며 한인총회를 구성하고 매년 6월에는 총회를 열고 있다. 남침례교 한인교회들은 1981년 LA에서 ‘북미 남침례회 한인교역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첫 총회를 열었다. 이후 ‘북미 남침례회 한인교회 협의회’와 ‘북미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라는 이름을 거쳐 2005년부터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다. 2012년 새로 발행된 총회수첩에 따르면 31개 지방회에 45개주 719개 한인교회가 속해 있다.

총무 엄종오 목사에 따르면 가입중이거나 지방회에 등록이 안된 교회까지 치면 9백여 한인교회가 남침례교에 속해 있다. 최초의 침례한인교회는 1956년 워싱톤 한인침례교회이다. 서울의 한국 침례회의 도움을 받은 김창순 박사는 워싱톤 DC에서 시작했다. 미주의 한인침례교회중 매릴랜드 지구촌교회(김만풍 목사)와 필그림교회(손형식 목사), LA한인침례교회(박성근 목사), 타코마제일침례교회(최성은 목사), 뉴송교회(박인화 목사)등은 성도들이 2천명이 넘는 교회이다.

총무 엄종오 목사는 “남침례교 한인총회인 미주한인침례교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선교, 교육, 교제”라고 말했다. 남침례교 특징인 선교를 위해 국내외선교부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들이 성장하도록 매년 지원하고, 교회들이 개척되도록 돕는다. 또 한인총회 산하의 지방회와 협력이 필요한 사역을 공동으로 수행한다.

남침례교 직영신학교는 골든게이트 침례신학원, 미드웨스턴 침례신학원, 뉴올리온즈 침례신학원, 싸우스이스턴 침례신학원, 써든 침례신학원, 싸우스웨스턴 침례신학원등 6개가 있다. 또 미주한인침례교 인준 신학교는 워싱톤침례대학교(총장 장만석)과 남침례 신학대학 대학원(학장 박성근)이 있다. 한인교회는 신학교가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남가주 93개, 텍사스 75개의 순이다. 뉴욕은 30개, 뉴저지는 9개의 남침례교 한인교회가 있다.

한국의 침례교단 ‘기독교한국침례회’

남침례교가 세계 최대교단이라면 한국의 침례교단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에서 침례교 총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라고 부르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다음 4번째 교세를 가진 교단으로 2,900개 교회의 80여만 성도가 속해 있다. 침례교와 다른 교단과 다른점은 침례교는 침례받은 사람만 센다. 침례신학대학교 도한호 총장에 따르면 요즘은 과장이 많기도 하지만 한국의 침례교인은 80만은 넘는다고 파악했다.

한국의 침례교 신학교는 경기도 안성에 수도침례신학교, 대전에 침례신학대학교가 있었는데 2006년 교육부에서 통폐합 허가를 받아 대전에서 흡수통합을 했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침례교회로는 지구촌교회(진재혁 목사),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목사), 하늘비전교회(오완섭 목사), 대전중문교회(장경동 목사)등이 있다.

도한호 총장은 한국의 침례교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며 “1889년에 캐나다 독립선교사 말콤 펜윅이 와서 선교를 했는데 교회가 120개 정도로 성장했다. 해방후 1950년에 남침례교가 중국선교를 못하게 되니 한국에 와서 말콤 펜윅이 선교하던 동아기독교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남침례교 선교를 시작했다. 그 두개가 합해서 오늘날의 한국의 침례교회가 되었다”고 전했다.

남침례교의 3가지 성장비결

한인총회가 제작한 동영상을 보면 남침례교가 세계 최대의 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의 여러 교단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열풍에 휩싸였지만 남침례교는 복음주의 노선을 더욱 선명히 했고 온전히 믿음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1990년대 조사에 따르면 급성장 500교회중 89%가 복음주의 교단에 속했고 그 중심에는 남침례교가 있다.

신앙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침례교는 다른 복음적인 교단과 크게 구별이 안된다. 침례교는 유일한 우리의 삶과 신앙의 표준이 되는 성경이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예수의 신성과 동정녀에게 났음을 믿는다. 예수만이 세상의 구주임을 인정하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온전히 믿는다.

침례교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신약교회 복음주의와 종교개혁적인 전통에 견고히 서있다. 2004년 바나 리서치 여론조사는 목회자 601명을 대상으로 성경의 무오성등 6가지 핵심사항에 대해 질문했다. 교단마다 목회자들의 성경적 세계관이 달랐는데 남침례교 목회자의 성경신앙관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둘째, 남침례교는 헌신적인 이웃사랑과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성장해 왔다. 고난이 있는 이웃들과 함께 했으며 조건없는 이웃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다. ‘Disaster Relief(재난구조 프로그램)’을 통해 적극적으로 재난당한 사람을 돕는다. 적십자와 구세군에 이어 미주에서 3번재 큰 재난구조단체이다. 태풍과 지진등 비상사태가 발생시 7만5천여명의 훈련받은 자원봉사가 구조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다. 세계기아구제펀드(World Hunger Fund)를 운영하여 아프리카등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웃과 사회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에 위해 교단차원의 일을 집중해 왔다.

셋째, 남침례교는 전도와 선교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한다. 본부차원에서 전도와 선교전략을 개발하고 추진한다. 복음전파를 담당하는 북미선교본부는 1억2천만불, 국제선교본부는 3억불의 예산을 가지고 활동한다. 91년부터 2000년까지 남침례본부는 1,500 캠페인을 통해 매년 1,500개 교회를 10년동안 총 1만5천개 교회를 미국내에 개척했다. 침례교 신학생들이 참여하는 ‘느헤미야 프로젝트’를 통해 교회개척을 확대했다.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 1997년에 설립된 북미선교본부는 북미지역을 5개지역으로 구분하고 북음화율이 낮은 29개 대도시를 집중공략하고 있다. 지역교회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복음화율을 높이는 전략이다. 그러한 노력으로 2009년 한해에만 86만명이 침례를 받았다.

해외선교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845년 교단 설립후 교단차원에서 선교를 집중하기 위해 해외선교본부를 만들었다. 중국을 첫선교지로 하여 두명의 선교사를 파송한후 많은 사람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나갔다. 2010년 기준인 국제선교본부를 통해 세계 5,600명의 선교사가 해외로 파송되었다. 단일교단으로 가장 많은 숫자이다.

남침례교단의 신학
침례교회는 왜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안하나?
침례교회는 왜 침수 침례를 하는가?

흔히 침례교단이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으로 개인적인 신앙고백에 의해 믿는 자에게 침례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에게 침례를 주지 않는다. 골든게이트 안상희 교수 “남침례교는 성경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사명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볼때 침수 침례의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래서 침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물에 잠기는 침수 침례를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안상희 교수는 신학적으로 다른교단에 비해 틀린 것은 “전통에 억매이지 않고 성경의 가치를 가장 권위를 두고 이상을 실현하는 신약교회를 추구하며 무엇보다 선교지향적인 교단이다”고 말했다. 도한호 총장은 침례교회의 특징을 지적하며 “침례교의 신학은 개혁적인 신학과 별차이가 없다. 장로교에도 교파에 따라 극단적인 칼빈주의와 온건적인 칼빈주의 노선이 있는데 침례교는 온건주의적인 칼빈주의가 많다. 행정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다른 개혁교단과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남침례교는 어떤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가? 남침례교는 교단의 믿음의 내용을 담은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가 있다. 1925년에 제정된후 개정을 거쳤으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인간, 구원, 하나님의 은총이 목적, 교회, 침례와 주의 만찬, 주일, 하나님 나라, 종말에 될 일들, 전도와 선교, 교육, 청지기 직분, 협동사업, 그리스도인과 사회질서, 평화와 전쟁, 종교적 자유, 가족등 19가지 조항에 대한 믿음의 내용이 들어있다. 한국의 침례교는 남침례교의 것을 적용하고 수정하여 ‘침례교의 이상와 주장’이라는 침례교 신학에 대한 간단한 10가지 조항이 있다.

안상희 교수는 침례교의 신앙고백에 대해 전하며 “여러 교단들이 역사적으로 많은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도 그 신앙고백을 존중하고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후기교회 역사에서 생겨진 신앙고백문들이 결코 성경의 위치를 대체한다고 믿지 않는다. 잘못하면 후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성경의 위치를 대체할수 있으므로 삼가한다. 하지만 다른교단의 고백을 존중한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의 설명은 왜 침례교회들이 예배중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침례교는 성경외에 사람이 만든 어떤 신조에도, 또 어떠한 신학에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을 믿지 않거나 부인한다기 보다는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교단은 헌법이 있어서 규정을 따르지만 침례교회는 성경이 헌법이요 규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침례교는 왜 장로가 없는가?

남침례교의 다른 특징은 ‘장로’라는 직이 없다. 반면 한국의 침례교단에서는 큰논란끝에 ‘장로’라는 직은 없지만 호칭으로 사용한다. 침례교회의 안수집사는 장로교의 장로격이다. 하지만 유교적이며 직분을 계급적으로 보는 한국사회의 특성상 침례교 ‘안수집사’와 장로교 ‘장로’를 다르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미주의 한인침례교회에서도 ‘장로’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있다.

도한호 총장은 “한국의 침례교는 집사와 목사만 둔다고 했는데 그것은 변함이 없고 안수받은 집사들을 ‘장로’로 이름만 호칭한다. 작년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에서 통과되어 교회가 원하면 장로라고 호칭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남침례교는 왜 장로라는 직이 없을까? 골든게이트 안상희 교수는 “남침례교는 성경에 나오는 장로라는 직분은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문화적인 위치개념으로 본다. 우리나라에도 ‘마을유지’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마을유지’가 정치적인 직분이 아닌 것 처럼 성경에 장로라는 호칭이 나오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라고 안본다. 신약교회의 직분은 집사와 목사만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안상희 교수는 한국 침례교의 장로 호칭제에 대해 노코멘트를 했다. 사적이었다면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남침례교단의 특징-교회중심

남침례교는 감리교의 요한웨슬리, 장로교의 칼빈, 루터교의 루터와 같은 창립자나 독보적인 중심인물이 없다. 남침례교의 힘은 작은교회에서 부터 대형교회,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기까지 미주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위해 하나되어 협력하는 것에서 나온다.

남침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며 교단의 영문이름이 ‘회의체’라는 뜻의 ‘Convention’이 들어가는 이유이다. 모든 회원교회들이 참여하는 연례모임는 그동안 남침례교의 협력적인 특징을 상징한다.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 예산을 10%을 교단 총회로 보내 재정의 대부분은 선교 교회개척 사회봉사를 위해 사용된다.

침례교 중요한 특징은 소속교회들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교회연합모임인 총회와 지방회가 있지만 협력을 위한 목적이며 교회운영에는 간섭을 안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떤 외부의 우월적인 교회개입을 허용안한다. 개별교회 중심주의적인 특징은 성경적인 특징위에서 저마다 다양한 색깔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

도한호 총장은 “다른교단에 비해 행정적으로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교회의식을 그냥 의식이라고 생각하지 신령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물론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성만찬에 예전적인 의미를 안두려 한다. 모든 개신교도 그렇지만 침례교도 만인제사장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이어 도 총장은 “침례교는 헌법이 없다. 그래서 총회가 느슨한 규약을 가지고 그 규약안에서 행정을 한다. 교회신자가 되거나 교인수에 들어가기 위해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 외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장로교는 회중정치로 당회-노회-총회가 있지만 침례교는 교회가 당회대신 사무처리회라는 것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고 설명했다.

골든게이트 안상희 교수는 “남침례교는 다른 교단에 비해 교인들의 의견을 중시하는 회중정치 체제를 취하고 있다. 교회내 계급이나 직분을 강조하기 보다는 모든 교인들이 동등하고 공정하게 의견이 반영되도록 의견을 모아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침례교회의 회중정치제도의 이상이다. 당회가 세상에서의 대의정치에 비유된다면, 침례교회는 비교적 회중의 뜻을 더욱 모으려고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면이 많다고 하겠다”이라고 소개했다.

남침례교는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줄 수 있다?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 엄종오 총무는 목사안수에 대한 미국 남침례교, 남침례교 한인총회, 한국 침례교의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고 밝혔다. 미국의 한인 남침례교회들은 미국 침례교와 한국 침례교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먼저 미국 남침례교 교회들은 꼭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소명을 받고 목회능력이 있으면 목사안수를 하기도 한다. 교회의 총회에서 결정이 되면 안수위원회를 구성하여 목사안수를 하게되며 목사안수증도 총회나 지방회가 아닌 교회에서 발급을 한다. 하지만 현재 남침례교 산하 6개 신학교는 역사가 150여년에 달하고 목회학 석사이상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의 수도 1만 8천여명에 달해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지 않고 목사가 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

반면 한국의 침례교는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뿐만 아니라 지방회의 시취과정을 통과해야 목사안수를 받을수 있다. 미국의 한인침례교회는 한국과 같이 신학교 졸업과 지방회의 시취과정을 통과해야 하지만 약간의 문제로 시취과정을 통과하지 못했어도 담임목사의 최종결정으로 목사안수를 줄 수 있다. 남침례교 뉴욕지방회같은 경우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전도사 과정을 하는등 시취과정을 밟지 않으면 목사안수를 받을수 없다.

침례교의 목사안수는 ‘목사’ 또는 ‘목회’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남침례교의 한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목회자는 다음과 같이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한국교회 문화에서는 목사를 계급으로 생각하지만, 미국 남침례교회 문화에서 목사는 상대적으로 기능적으로 이해합니다. 목사는 실제로 목회하는 (즉, 양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더라도 현재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 않다면 목사가 아니라고 미국 남침례교인들이 이해합니다. 영어로 Pastor는 pastoral ministry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수받은 사람은 Reverend, 안수받은 성직자가 되겠지요. 한국사회에서는 목사를 계급으로 생각하기에 목사가 쉽게 되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회사역은 어려운 것인데, 그 어려운 일을 자발적으로 자처해서 하는 사람이 존경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국 침례교인들은 자연히, 혹 신학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아니면 전혀 안했더라도,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목사(Pastor)라고 부릅니다.”

“이런 목사에 대한 논쟁이 자꾸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한편으로는 자질이 부족한 목사들이 있는 것도 원인이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말이 많은 한국사람들의 정서나 문화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사람들 표현으로 한국사람들은 ‘nosy’하다고 하지요. 저는 백인침례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으면서,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차이점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들도 남들의 부족함을 다 보지만, 가십거리로 삼는 것에 대해 아주 부끄럽게 생각하는데 반해 한국인은 문화적으로 그것이 너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그런건지 때로는 미국문화의 신사적인 태도가 부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150130 뉴욕 원로목사 이순옥사모(이창송원로목사) 소천 – 연길 용정침례교회

150130 뉴욕 원로목사 이순옥사모(이창송원로목사) 소천 – 연길 용정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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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2 05:38:13

전화가 바뀌고 지난 몇년간 살다가? 보니 뉴욕에, 그래도 해마다 한번은 인사를 드리고 살아오던 우리 침례교회의 원로이신 이창송목사님 사모님이 2015년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떠있다.

모르고 있었는데 사모님께서는 우리 고향 연길 근처 시인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 출신이다.

충청도 출신인 목사님과 1940년도에 결혼하셨다고 하니 목사님도 연길에 살았거나 내가 충청도 출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하고 가깝게 지내셨던 그런 이유가 있었던 같다.

국민학교 5-6년 때인가 김신조 124부대가 청와대에 쳐들어온 1.21 사태 때 뭔일로 새벽에 우리가 살던 인천 숭의동에 오셔서 서울에 난리가 났다고 소식을 전해 주셨다.

사모님이 섬기셨다는 연길 용정교회에서 순교하신 침례교 김영관 4대감목(총회장)의 형님 김영국감로(장로)는 우리 고모님의 시부이시다. 고모는 김중길, 김중헌 형님들을 29에 홀로 되어 키우시고 그 손주 6을 떡장사와 농사로 키우셨다. 손주들은 북경대, 남경대, 하르빈대등 중국 최고 명문대들을 나와 모두 잘 살고 있다. 일송정 밑 혜란강가의 용정동에서도 대학을 모두 나온 집은 별로 없다는데… 모두 돌아가셨지만 둘째 중헌형은 할아버지 형제가 순교하신 고향교회를 끝까지 지키시고 이제는 홀로되신 형수가 교회를 지키고 있다.

아우러, 이창송 원로 목사님의 차남 이선일목사도 작년 2016년 10월 14일 54세(1953,1,13)에 소천했다는 소식도 올라와 있다.

<이순옥 사모 소천>

뉴욕안디옥교회 이순옥 사모(이창송 협동목사)가 지난 1월 30일 오전 8시 향년 91세로 지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 이순옥 사모는 1923년 5월 21일 중국 간도성에서 출생해 1940년 12월 18일 이창송 목사와 결혼하고 1987년 11월 30일 도미, 목회자의 사모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던 중 지난 1월 3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 이순옥 사모의 큰 아버지되는 손상렬 목사는 1921년 만주의 서간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제헌병에 순교를 당했고, 오빠 손창옥 집사는 관도구 교회에서 교인들을 대표하여 갖은 고문과 투옥을 당했으며, 모태부터 믿음생활을 하며 침례를 받았던 만주의 종성동교회에서는 1932년 김영국 감노와 김영진 목사 형제분이 공산당에 의해 온 몸의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며 장렬히 순교하는 말 그대로 피흘린발자취를 걸어온 신앙의 족적을 남겼다.

장지는 미국 롱아일랜드 파밍데일의 파인론 메모리얼 파크이며, 유가족으로는 현재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인 이선일 목사 외 1남 3녀 내외가 있다.

필유일목사 소천 90세 2017년 4월 23일

필유일목사 소천 90세 2017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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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6 10:25:58

연합교회가 다 쓰러져가는 것을 보고 가서 풀도 갂아주고 하다가 개인사정으로 달라스, 텍사스로 떠나면서 갖고 있던 전공책들을 목사님께 떠 맡기고 떠난것이 1986년 도 쯤인가???

교회가 문을 닫고 어찌 지내시는가 하는 생각으로 30년이 지난 셈이네???

어떤 서울침례교회분이 찾아와 주셔서 자연스럽게 소천 소식이 인터넷선상에 떠 있음을 알게 된다.

딱 일년이 되었군…

조그만 더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다면 생전에 인사라도 더 나누웠을 덴데…

남은 분이 처조카 한분이라 하니 그 천사같이 착한 사모님은 벌써 소천을 한 모양이다….

그리운 분들이… 세상은 점점 더 패악해져 가는 데 하늘 나라로 가신다…..

워싱톤 DC에 한태경, 안병국등등이 가셨고,,,한국에 우리 침례교단의 영원한 총무 김갑수목사님도 가시고…

김승학목사님은 아직 생존해 계시려나???

이동원목사의 지구촌교회, 워싱톤 제일침례교회를 세우신 김현칠목사님도 가셨을 것 갔고..

김용구씨는 1936년생쯤 되니 생존해 계실것 같기도 하고.. 그 형님 김용두?? 목사님은???

문대연, 김광수 목사님등오 가셨을것 같고…

동아기독교의 원조? 김광택음악 목사님도 나이가 많으신데…

뉴욕 이창송 원로 목사님도 연로하시고…

몇주전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소천 하시고…

우짜꺼나 다 잊고 하늘 나라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만나는 날이 오겠다…

사실, 필유일 목사님은 장로교단 출신이지만 뭔 연고로 해서 우리 침례교단의 큰 기둥이었던 서울침례교회에 전도사를 역임하였다.

그후 아마도 1960년대가 되기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 동부 수도인 워싱톤디시 근터 메릴랜드주 발티모어에 첫교회를 담임하면서 그 지역의 크신 일들을 하셨다.

<지역신문 2017.4.25>

볼티모어지역 최초의 한인교회인 볼티모어 한인연합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역임한 필유일 목사(사진)가 23일(일) 오후 6시 40분경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고인의 고별예배는 25일(화)오후 7시 30분 제섭 소재 오웰 퓨너럴 홈(Howell Funeral Home)에서, 하관예배는 26일(수) 오후 2시 메리엇츠빌 소재 크레스트로운 묘지(Crestlawn Cemetery)에서 열린다.

유족으로는 현재 처조카인 은숙 Vallone씨가 있다.

필유일 목사는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1962년 필라델피아의 이스턴 침례신학대를 졸업하고 1967년 볼티모어연합교회로 부임해 1994년까지 27년간 봉직 후 원로목사로 은퇴했다.

필유일 목사는 메릴랜드주 클락스빌 소재 현 자택에서 10여 년간 거주해 왔으며 최근에는 콜롬비아에 위치한 노인복지센터인 하모니 홀에서 지내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아왔다.

문의 (410)900-9910 임지혜
▲고별예배 장소 10220 Guilford Rd., Jessup, MD 20794
▲하관예배 장소 2150 Mount View Rd.,Marriottsville, MD 211104

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의 3 한인 침례교회들 180310

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의 3 한인 침례교회들…
침례교역사- pic

2018-03-10 06:47:27

우리 침례교단은 미국 남침례교단과의 깊은 관계 때문에 미국물을 많이 먹었다.

해서 대형교회 강남중앙침례교회 김충기 목사님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총회장님들이 미국으로 이주 하였다.

1980년대 초 메릴랜드의 볼티모아의 외곽도시 그렌버니의 아주 작은 침례교회 베들레헴에서는 늙은 목사와 힘쎈 의사가 쌈을 하고 모두 물러가고 우리식구와 이대를 나온 배전도사와 다리를 절던 이 자매등이 남아 있었다.

그 때 서울 종로침례교회 전도사를 했던 유종구목사가 오기 전 까지

워싱톤 봉사센타 한태경목사님, 남침례교 한인 디렉터 김광수 목사님들이 돌아 가면서 땜빵을 하고 있었는데…

울 오마니는 한국 10대 대형교회의 하나인 강남침례교회 김충기 목사님에게 미국에 오라고 했다.

당연히 안 오지…ㅎㅎ

하지만, 그 때 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천국? 같은 나라에 안 오겠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안 돼었다. ㅎㅎ

그건 당연히 시대적 착오 이였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윗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무지의 소치였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르는…ㅋㅋ

하여간, 결국 김충기 목사님도 서부 워싱톤주 어디에 생활의 터전을 이미 다 마련해 놓고 있기는 했지만…

김충기 목사님은 우리 침례교단에서 처음으로 미국이주를 거부?한 총회장이었다 할것이다.

침례교단은 열악한 환경에 소수약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실 먹고 살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여서 돈많은 미 남침례교단의 선교부는 커다란 도움이자 돈줄이었다.

선교사들과의 깊은 관계는 미국이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사실 어릴적 동화대회등 교단 모임에 가면 목사님 행색이나 수준들이 조금 뒤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ㅎㅎ

하지만, 나는 우리 침례교단의 선배님들의 이런 못습들이 넘 자랑스럽다.

일설에? 초기 선교사들은 담당지역을 나누웠는데, 언더우드등 장로교, 감리교단 선교사들은 조정, 양반들과 손을 잡고 교육기관등 학교와 교회들을 많이 세웠지만,

우리침례교단은 가장 외진곳 충청북도, 경상북도, 울릉도 그리고 함경북도와 만주, 시베리아까지가 그 담당이엇다.

우리 외사촌들이 남아있는 연길 용정용신촌(당시 석정향) 교회에서 1932년 9월 15일 공산도당들에 의해 목사님과 감로님들이 탈피 순교의 순간있기 그 훨씬 전에도 맨몸으로 시베리아까지 간 전도단들이 사할린의 얼음바다에 배가 전복되어 순교하는 일들도 일찍이 있었다.

부산 영안침례교회 박정근 목사의 조부 되시는 예천의 박기양 로목사, 노재천, 신성균 목사님들은 만주 벌판을 걸어서 전도하던 정말 대단한 분들이었다.

교단이 작아서 한국교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한반도의 외지고 버려진 산꼴짝에서 침례교인들의 손에 의해 일어 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 침례교단의 원조 동아기독교의 자랑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침례교인것이 매우 대단히 자랑스럽다.

약간 덜 배우고 순수해 보이는 …ㅎㅎ

우리 침례교단의 거장이신 예천의 박기양 노목사님은 거의 평생 교단회의에는 참석하시지 아니 하였다. 아니 그 이름 조차 올리지 아니 하셨다.

초기 함경도 원산 본부를 지키던 펜위익 공부(카나다인 침례교 첫선교사 조상이 영국 공작이였다고 해서 인지 옛어른들은 그를 공부라 불렀다)의 유산 관리인 3인중 하나이며 서울침례교회를 처음 시작한 안대벽목사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 하여 대한침례교회를 세우시고 박경배목사님이 후임으로, 그리고 충청도 안희묵목사를 그 후임으로 초청했으나 종국에는 안희묵목사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교회는 문을 닫았다.

조효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1958년 침례교단 분렬시 선교사 젊은측에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동아기독교 출신인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한번 찾아볼 일이다.

그리고 많은 교단의 브레인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에 유학등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한태경, 김광택형제, 김용구, 필유일, 김승학, 안병국, 신석태등등이다.

이들은 왜인지는 알수 없으나 워싱톤에서도 최고 좋은 동네 베데스다, 포토맥에서 바로 벗어난 락빌이라는 동네에 정착했다.

베데스다는 미 육군병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몰라고 3-40년전에는 전 미국에서 학군이 가장 좋은 동네이기도 했다.

이는 워싱톤 디시의 서북에 해당하는 동네로 당시 락빌의 와이트 몰은 뉴욕 밑으로는 가장 좋고 비싼 백화점이었다.

그 밑 워싱톤의 남서쪽 버지니아에도 한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이는 나중에 더욱 번창하게 된것 같다.

하여간 이미 5-60년대 정착한 이들은

김광택집사 형제는 볼티모어 매릴랜드주립대 교수로,

연길 한태경목사님은 워싱톤한인봉사센터(실버스프링)을 운영하고 1980도 쯤 연길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김용구 집사님은 치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치공소는 제일 비싸다는 와이트몰 빌딍에 있었고 나중에 온 신석태집사도 치공을 하고 있었고 1981년인가 그 부친되시는 신정호 목사님이 소천 하셨다.

그 후 바로 신석태 서울 침신 교수도 하던 집사님은 목사가 되어 1982-3년 경 일본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 나갔다가

이후 미남침례교 디렉터로 있던 김현칠목사가 세우고 김호식박사(ㅋㅋ 또 달라스 텍사스의 원호식박사라고 쓴다)가 초기 학장으로 틀을 세운 워싱톤침례신학교 학장으로 왔다.

필유일목사님은 볼티모어 첫교회로 알려진 연합교회를 담임을하고 있었고..

안병국목사님은 워싱톤 한인침례 교회에 1960년도 쯤 한국에서 초청되어 와서 물러나 있었는데

80년대 초 쯤 침례교단 총회를 준비하면서 더나아가 이것이 세계선교자대회를 조직되고 다시 초교파적으로 세계 선교대회로 발전하여 유명세?를 탓고 한동안 거의 10년?? 세계선교자대회라는 것이 유행해서 해마다 그 대회를 치뤘다.

그리고 그 지역에

워싱톤 한인제일침례교회, 몽고메리한인침례교회, 워싱톤한인침례교회 3교회가 있었는데 아마도 일찍 시작도 했지만 여건상 다른 교단 교회 보다 훨씬 큰 교회로 한인 이민자들의 정신적 기둥역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소풍, 수련회, 부흥회등 모임이 많아서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내막도 많이 알았는데 이제는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것 같다.

각교회를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워싱톤교회에는 김원기목사가 젊은 나이에 있었고 90년도 쯤에는 서울대 이상훈 목사가 있었던 것 같다.

실버스프링 워싱톤한인 제일침례교회에는 김현칠목사가 떠난 후

이동원 목사가 오고 90년도 초 지구촌교회로 이름을 바꾼다.

이때 우연히 중공에서 용정 용신촌교회 육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사촌 김중헌목사와 고모가 오셔서 방문 중이었는데

머리 좋은 이동원 목사는 우리 사촌이 침례교 3대 감목 김영관목사 후손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날 저녁 예배 시간에 이동원 목사가 처음으로 교회 개명을 언급하며 교인들 의견을 물었는데 방문자인 나는 시건방지게 나서서 불가하다고 우겼다 ㅋㅋ

하여간, 미국 한인 역사에 이 3 침례교회는 커다란 존족을 남겼다 할 것이다.

워싱톤 한인 침례교회 – 창립 김창순박사와 심선식 박사 180310

  1. 워싱톤 한인 침례교회 – 창립 김창순박사와 심선식 박사
    침례교역사- pic

2018-03-10 16:06:45

우리 침례교단의 첫 이주 교회들 중에 당연히 첫교회 부터 쓰려하다 보니 여기 창립예배를 본 분들의 글이 있다.

잊어 가는 중에 이제 생각나는 것은 거의 20대 정도의 젊은 목사였던 김원기목사가 80년대 중반에 교회명을 ‘휄로쉽 교회’로 명칭을 바꾼것이 생각난다.

아닌가? ㅎㅎ 아마도 무슨일로 교회를 떠나서 ‘휄로쉽 교회’라는 다른 교회를 설립한것이 맞는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 이상훈목사등이 계속 있었으니….하여간

의사이신 것으로 보여지는 신선식이라는 분이 1957년 우연히 마켓에서 김창순박사를 만나 워싱톤한인침례교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귀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기록에는 김창순 박사가 1956년에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도 한다.

나의 삶 나의 신앙 / 12 심선식 (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 )

와싱톤 한인 침례교회 창설회원과 첫 세례교인

세례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 부터 받으신 성례전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예식” 이다.
인간이 자기의 죄을 회개하고 물로 정결하게 씻고, 성령 (하나님의 영)을 받고 새롭게 거듭나는 축복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 같이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되는 예식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나오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하느님의 음성이었으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내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나는 미국생활 첫 해는 뉴저지 주 주청소재지인 트렌톤(Trenton, N.J.)의 한 병원의 인턴으로 근무했다.
미국생활에 익숙해가며 병원의 당직의사로 근무하는데 분주했다.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에 와서 많은 것을 보며, 느끼며 배우게 되었다.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고, 모든 것이 풍부함에 놀랬다. 사람들이 참으로 친절했다. 인심이 좋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 쌀뒤주에서 인심난다” 드니 미국사람들은 풍요롭게 살아서 그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정신문명, 도덕문명이 물질문명과 겸비 되어 있어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히랍(그리스)에서 온 의사가 영어를 못하여 되돌려 보냄을 받을 난처한 형편에 처했었다. 내가 자원하여 그를 도와 그의 일을 분담하며 그의 환자진찰 면담을 같이하며 도와줘서 2-3개월 후 그가 되돌려 보냄을 면하게 된 일도 있어서 보람을 느꼈다.

터-키(Turkey)에서 온 부부 의사들은 동방교회교인이었고, 이란에서 온 의사는 이슬람교 신자였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자기 고향인가 어딘가를 향하여 꿇어 앉아 절하며 기도한다는 것을 듣고 나는 감탄했다. 신앙이 깊어지면 저렇구나 싶었다.
나는 햇내기 기독교인으로 기도하는 열성이 없이 지냈다.

한 일본계 미국인이 독일계 미국여인과 결혼 하여 살았는데 그 부부를 우연히 사귀게 되었다. 그 부인은 “바하이 교” 교인이었는데 참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대해주고 각종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자기 집에도 초청해줬는데, 자기 차로 나를 데리러오고, 데려다 주곤 했다. 그녀의 호의와 친절에 감동되었다. 신앙이 깊고 성숙하면 그렇게 좋구나 싶었다.

내가 6개월 거기서 근무한 후에 내 아내가 그 시내 다른 병원에 인턴으로 취직이 되어 왔다. 위에서 말한 바하이 교인 독일계 미국여인은 내 아내를 “기순아 기순아”하며 무척 사랑해주었다. 자기 남편의 공업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2층에 살림방을 하나 내주며 우리 부부가 주말이면 병원에서 나와서 거기서 살라고 까지 해 주었다.

병원에서 1년 근무하면서 의사들과 간호사들과 친해졌고, 전화교환대에서 일하는 아줌마들과,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친해지고 정이 들었다. 그리스마스의 경축이 요란하고 파티도 요란한 것을 따라 다니며 보면서 참으로 크리스챤들은 평화롭고 사랑하며 희망 차게 사는구나 싶었다. 말 보다는 행동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 해인 1957년에 와싱톤 (미국 수도)으로 옮아가서 정형외과 전문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하루는 한국 식료품상엘 둘려서 김치를 사러 갔다가 김창순박사라는 분을 만났다. 생전 처음 보는 분이다. 내가 여기 모 병원에 취직이 되어 왔다니까 반가워하며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었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니까, 그는 여기 이승만 박사가 옛날에 다니던 교회, 미국의 소리 방송을 한국말로 하는 황재경 목사님이 담임하는 큰 교회가 있는데 거기는 교인이 참 많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여 자기가 미국 남침례교단의 지원 하에 와싱톤 한인 침례교회를 창설하려고 하니 자기와 같이 일하자고 했다.

나는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세례도 아직 받지 않은 햇내기 기독교인이라고 했더니 그것은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했다. 이리하여 주일(일요일)이면 그가 시작하려는 교회가 있는 륏덴하우스가에 있는 교회엘 다니며 같이 섬기게 되었다. 교인은 몇사람 안되었고 뉴욕에 유학와 계시던 강원용목사님이 주말 마다 내려와 설교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분은 다니엘서를 많이 인용하여 설교하신 것이다. 다니엘선지자의 신실한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셨다. 그러던 중, 한국서 고아원 선교를 하시던 안병국 목사님을 전임목사님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비행장에 나가 환영하며 인사하니 활짝 웃으시며 옛 친구를 만나는 모습이었고 첫 인상이 좋았다. 교회는 활기를 내는 신생 교회가 되었다. 제직회도 구성되고 나는 집사로 일하게 되었다. 친교 봉사도 잘 하며 음식도 해서 나눠먹으며 교인간의 우애가 자라났다. 그 교회에서 결혼하는 젊은이들도 생겼다. 점점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주일이 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세례교인이 되고자 목사님과 상의했더니 새로 생긴 작은 교회인지라 세례(침례)성수탱크가 없어서 다른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도록 교섭이 되었다. 시외에 나가면 베데스다란 곳에 베데스다침례교회가 있었는데 거기엘 가서 우리 부부는 고무 옷을 입고 세례성수탱크에 들어가 요단강에 들어간 심정으로 거기서 아취벌드 목사님이 침례세례를 주셨다. 1958년 10월 17일었다. 죄를 회개하고 물로 씻고 정결한 거듭난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새 사람이 된 마음이었다. 그렇게 되어 우리 부부가 와싱톤 한인 침례교회의 창설교인으로 첫 세례교인이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는 옐루살렘에 병이 낫는 못이 라는 곳이 있었는데 가끔 천사가 나타나 못물을 동하게 했고 병자가 누군든지 먼저 동한 물에 들어가면 병이 낫곤 했던 곳이다. 한 38년 불구자였든 사람은 그 못에 먼저 들어가질 못하여 병을 고치지를 못했는데 예수님이 “네가 났기를 원하느냐” 물으시고 “일어나 걸어가라”하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곳이다. 베데스다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나도 30년 묵은 병을 고침 받은 은혜의 느낌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와싱통 한인 침례교회에 4년간 섬기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즐겼다. 교인은 점점 늘어났고 100명 정도 모였다. 나는 1961년에 캐나다 밴쿠버의 대학과 대학병원에 취직이 되어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교인들과 헤어지는 것이 참으로 섭섭했다. 35년 후에 내가 그 교회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인이 수백 명이 되어 있었고, 교회당과 교육관도 붉은 벽돌 건물로 크게 짓고, 주차장도 아주 넓었다. 예배에 참석하고 창설교인이자 첫 세례 교인이라며 내가 자신을 소개 했더니 더욱 반기며 기념품도 주어서 받아가지고 돌아 왔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창설하시는데 쓰시고, 세례를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사랑에 감사 감격하며 보람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할렐루야.

수도 워싱톤 DC 지구촌 교회(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 180311

  1. 수도 워싱톤 DC 지구촌 교회(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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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13:26:40

다음도 정부 사찰이 가능해지고 카톡도 사들이고…

정권도 바꼈지만 뭔 농간인지 인터넷상의 모든 인포메이션들이 다 없어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독재자들의 악행들은 인터넷에서 찾기 힘들고 인간검색?이라는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친일군사독재자들은 자신의 아이들 학교 갈 때 쯤에는 입학시험 다 없에고

지들이 간음 할 때쯤에는 간통죄라는 걸 없에고…

첩질하기에는 너무 늙을 때 쯤에는 ‘미투’로 모두를 발가벗긴다.

궁민덜은 죽을동 살동 살고 잇다.

하여간, 기억이 아스라히 사라져 갈 쯤 되니 급한 마음에 기억들을 살려보지만 인터넷에 옛 기록과 주소록 조차도 찾기 힘들다.

미 수도 워싱톤DC 지역의 3대 침례교회에 대해 쓰려고 하지만 그 기록을 찾기 쉽지 않다.

한국 침례교단의 젊은 브레인이던 김광택, 한태경, 김용구, 김승학, 안병국, 필유일, 조효훈목사등은 1957-8년경 교단의 분렬의 중심에 있었다.

기존 동아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안대벽목사부부를 중심으로한 포항파와 1950년 한국동란 직전에 들어온 미 남침례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전파 인데,

1953년경 설립된 대전 침례교신학교와 인천 시은고등공민학교, 그리고 인천의 고아원 성애원을 근거로 선교사들 편인 젊은 브레인들은 대전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기존 안대벽목사를 중심으로 한 노인네?들은 포항에서 총회를 하였다 하여 그 명칭이 주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선교사의 든든한? 빽이 있는 젊은 피들은 필연적으로 미국으로 유학 또는 진출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들은 첫 남침례교 선교사 나요한(John Abernathy) 사가 부친을 인천 성애원 원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선교사와 친했지만, 우리는 포항파에 속해 있었다.

또한 젊은 브레인들은 반대 대전파의 주축들 이엇지만 한국동란 당시 우리 집에 피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집이 충무로? 아니면 회현동?? 서울수복후 상이군인들이 점거하여 되 찾지는 못했지만…ㅋㅋ

하여간, 한국의 조그마한 교단 이었던 침례교단의 인재들은 김광택박사같은 경우에는 당시 이화여전 출신의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 여사와 영국 침례교 선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김용구 집사도 뭔 젊은 이들의 국제 대회에 참가 하기도 했다. 아마도 아주 어린 갓 20대의 나이들 이었을 것이다.

1963년경 교단의 영원한 총무 김용해 목사가 쓴 침례교단 역사 책을 보면 당시 총회나 회의 때 마다 이들이 유학가서 불참했다거나 소식이 없다라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ㅎㅎ

하여간, 이들이 유학이든 또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미국으로 이주 하게 되는데

안대벽, 박경배목사는 엘에이에 김장배, 이창송목사는 뉴욕에 그리고 훨씬 먼저 이주한 젊은 브레인들은 주로 미국의 서울 워싱톤 DC 지역에 정책을 했다.

조효훈 목사는 센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목사님 교회는 서울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제자훈련’의 본산지라 할수 있다.

한태경목사는 워싱톤 한인봉사센터(Silver Spring, MD)를 설립운영했고 김광택박사형제는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주립대학교수로 그리고 김용구, 신석태집사는 치공소로 성공했으며 김승학 목사는 Rockville 몽고메리 한인 침례교회를, 안병국목사는 1960년경 미주 최초의 한인 침례교회인 워싱톤 한인침례교회(1956년 창립, Silver Spring, MD) 초청으로 부임했고, 김현칠목사가 창립한 지구촌교회인 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에는 이동원 목사가 1983년 8월 27일 2대 목사로 취임해 오게 되엇다.

그 찬란했던 규모와 역사를 뒤로 하고 락빌 몽고메리 한인 침례교회는 2018년 3월 현재 2015년경 교회분렬로 어려움을 겪다가 요즘 급성장하는 스페니쉬 교회와 전격 합동했는데 지역 한인회장의 공이였다고 하는 소식이 마지막인것 같다.

이 대형교회를 담임 발전 시킨 분이 김승학목사님인데 이제는 가물거르는 기억에 목사님이 사모님이 먼저 소천하고 새 장가를 드셨는데 믿지않는 분이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던것 같고 실 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은퇴를 하지 아니해도 될 나이였는데 교회를 그냥 사직한것으로 기억된다. 여러가지 권력욕심?이 없었던 목사님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일 수도 잇지만…

한국동란당시 침례교단은 거룩성을 유지 하기 위하여 이산 가족이나 상처한 목회자의 재혼을 금지 시켰던 적이 잇다.

오래전 이긴 하지만 이런 일들로 목사님은 교회를 사직 했을 수도 잇다.

하여간 재혼해서 지역을 떠났는지 어디서 재미있게? 사시는지 그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 락빌 몽고메리 한인침례교회와 김승학목사님에 대해 서는 3편에 더 쓰기로 하고…

오늘 지구촌교회 즉 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에 대해서는 많은 인포메이션이 더 이상 없지만,

교회 사이트에 연역이 있어 남긴다.

  1. 11.10.본 교회는 미 침례교회 교단 본부의 성원과 창립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로 김현칠목사를 모시고 켄싱턴 침례교회에서
    성인 101명과 어린이 35명, 총 136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일한인 침례교회 에서 창립 예배 드림
  2. 11.9. 현재 위치에 있는 교회 건물을 구입하고 워싱턴 한인교회
    역사에 최초 자체 건물을 소유하고 입당
  3. 11.9. 새 성전을 완공하고 헌당예배와 창립 6주년 기념예배와
    안수식 거행
  4. 8.2. 처음으로 지구촌 장학회를 설립함 (공용빈장학회)
  5. 1.23. 김현칠 목사부부를 남침례교단 국내 선교부 켈리포니아 선교
    책임자로 파송

이 때 김현칠 목사님은 스스로 체험이 없었다고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과 그 솔찍함에 경탄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7대통령의 법률자문위원이었다는 고한실 박사의 기록에 보면 1970년 김현칠목사님께 침례도 받고 잊혀져 가는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제일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1년만에 교회에 A씨와 쌈이 나서 목사님과 같이 나와서 장로교로 갔다가 안식일 교인이 되었다고 했다.

일제와 전쟁 후 미국에서 모두 최연소로 법률시험?에 합격한 기록을 갖고 계신 석학이지만 잘못 쓰신것 같다.

1980년 쯤을 잘 못 쓰신것 같은데 1980년도도 아니고 그 이후 일것이다.

하여간, 1981년도에 와서 김현칠 목사님이 떠난 것도 그리고 이동원 목사가 온것도 그리고 김만풍목사와 공동목회로 이름을 남기고 한국으로 간것도…

이동원 목사 부임 초기인가 한국의부흥사 최이식목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한적도 있고 그 때만 해도 최이식목사가 늘씬했다.

신약을 하루에 한번씩 읽었다던 군대시절의 청년은 아니였지만…

최근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글에는 그들이 그의 추종자 였다는데… 우리교단의 최고 부흥사 오관석목사도 자신을 인정한다고…

이를 내 쫗은 사람이 김충기목사님인것 같은데 세습문제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충기목사님이 뚝심이 있었던 것 같다.

신약을 하루에 한번씩 읽었던 성령충만한 젊은이 최이식은 무엇을 바라고 무슨 부흥의 비법을 얻기 위해 베뢰아 학원?에 등록했던 것일까??

그 비법들이 신약에서는 찾지 못했단 말인가???

지나온 이야기를 쓰다가 이야기들은 비상한다.

하여간,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신약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다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믿거나 말거나…

몇몇 석학들, 정말로 범상치 않은 인간들이 거의 확실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피력하고 자신들이 맞다고 확고하게 말하지만 이 모든 신념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법칙이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 워싱톤 DC 한인침례교회들
    2018-03-11 16:06:49

미국의 서울 워싱톤DC 지역의 3대 한인 침례교회

  1. 워싱톤 한인침례교회 (1956년)
  2. 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 (지구촌교회)
  3. 락빌 몽고메리한인침례교회

를 쓰다가 이 지역 장로 교회 원로목사님의 1960년대 이야기 가 잇어서 올린다.

지역 4대 교회가 1960년대 말로 세워진것을 보면 한국 침례교인들이 얼마나 일찌 미국에 진출했는지 알수 있다. ㅎㅎ

ㅎㅎ 1958년 한국 침례교단의 분렬 때에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젊음 브레인들의 수장이었던 한태경목사님(워싱톤 한인봉사쎈타 설립운영)은 미국에서도 해결사로 나서신다.

1980년도 직후…


2009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본지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초창기 한인교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도록 김택용 목사의 글을 연재한다. 김택용 목사는 1976-77년 제2대 워싱턴지역 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워싱턴교계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김택용 목사는 현재 워싱턴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이며 워싱턴 신학교 학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는 워싱턴한인사회의 시작과 발전-역사 이전의 한인교회, 초창기 한인교회 12교회, 초창기 교회 통합 운동과 초기 교회 연합사업 등에 대해서 집필했다.

4)네 번째로 수립된 교회-워싱톤 한인연합장로교회

워싱턴 지역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교회는 워싱턴 한인연합교회이다. 이 교회는 1969년 11월 2일에 16th Street, NW, Washington, DC 선상에 있는 미국인 제6교회당에서 설립되었다. 처음 시작 할 때의 참석인원은 장년 36명과 아동 13명이었다. 이 교회는 담임 목사 없이 김응창 장로를 비롯하여 이춘삼, 강종철, 이응환, 최창욱, 정학수, 김성덕, 김순복, 김수희, 최경남씨 등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주일마다 주위의 여러 목사들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도록 하였다. 강사로 초청된 설교자들은 설의돈, 김기복, 김선도, 김택용, 김승학, 한태경, 한제호, 박관빈, 김인수, 윤영봉, 김병서, 신성국, 김현칠, 김유식 목사 등이었다.

1970년 8월 2일에 정용철목사가 초대담임목사로 초빙을 받아 부임하였다. 한국에서 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되어 있던 정목사는 에큐메니컬 정신에 입각하여 목회를 하였으며 1974년 9월에 미국연합장로교(현재의 Presbyterian Church, USA) 교단 수도 노회에 가입하였다. 예배장소는 정 목사의 재임 후반기부터 Bethesda, MD 소재 Trinity Presbyterian Church와 공동 사용하는 형식으로 공유하기 시작하였다.(정용철 목사가 15년간의 시무를 마감하고 1984년에 정년 은퇴를 하였다. 현재의 담임 목사는 안현준 목사)

5)다섯 번째 교회-베데스다 한인침례교회

베데스다 한인침례교회는 1969년 워싱턴 한인침례교회의 협동 목사로 있던 한태경목사가 동 교회 협동목사직을 사면하고 새로 교회를 개척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새로 이주 해온 침례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됐으며 위의 두 장로 교회들처럼 침례교회도 양립이 된 것이었다. 이 때 워싱턴 한인침례교회 측에서는 모든 교회가 다 하나로 합하는 일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같은 침례교회만은 둘이 양립하는 것보다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러 교인들이 후원하는 가운데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마침, 한태경 목사가 1971년부터 필라델피아의 Crozer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담임 목사직을 사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동 운동은 힘을 얻게 되어 1971년 8월 8일을 기하여 베데스다 한인침례교회와 워싱턴 한인침례교회는 무조건 합동하게 되었다. 베데스다 한인침례교회는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하였고 담임 목사도 공석 중에 있었음으로 워싱턴 한인침례교회에 흡수 통합이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다섯 번째의 한인교회는 워싱턴 한인침례교회의 일부가 된 것이다.

6)여섯 번째 교회-버지니아 한인침례교회

버지니아한인침례교회는 1972년 4월 2일 부활절을 기하여 Arlington, VA 소재 Westover Baptist Church의 Chapel 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창립 예배에는 박관빈 목사의 인도 하에 장년 12명과 유년 18명이 회집 하였다. 이 교회는 Washington, DC 지역을 벗어나 버지니아 주 교외에 설립된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 초창기에는 초교파 교회를 지향하면서 교회 이름을 버지니아한인교회(Virginia Korean Community Church)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기치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76년에 남침례회 회원교회로 가입하고 버지니아침례교회로 개칭하였다. (1987년 현재의 자체건물을 구입하여 정착하였다. 1992년 4월 박관빈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 되어 은퇴하였다. 현재의 담임 목사는 양승원 목사)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180314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워싱톤 DC

침례교역사- pic

2018-03-14 10:32:09

230315) 40여년전 조그마한 신학원으로 시작한 우리 남침례교 워싱톤신학대학이 미국의 정식 4년제 버지니아 워싱톤대학교와 신학대학원으로 바뀌면서 성장했는데…

몇년전 뭔 동양전문대 학장인지 뭔지 하는 이가 이 대학나왔다고 사기를 쳐서 뭔가에 궁금해 하는 궁민들이 몰려서 단 하루에 1,000이 넘게 쳐들어?? 와서 난리가 났는데…

다음 블로그가 사라지면서 그 댓글들과 기록들은 다 없어져 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미남침례교와 한국침례교의 이름을 도용한 사이비들이 넘 많아서 우리의 정통성을 증거하고 있다.

전 부인이 구원파인가 뭔가하던 유명인 JYP도 뭔 성경공부세미나?를 서울침례교회에서 한다고 해서 깜짝놀라 찾아보니 우리 서울침례교회가 아닌 어디 경기도 다른 도시에 이런 똑같은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한다는 것 이었다.

개검들로 인해서 법이 없는 나라에서 1946년에 세워진 서울침례교회 이름을 도시만 틀리다고 똑같이 사용한다는게 얼마나 미개한 나라인지 증명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소위 공인이라고 한다는 유명 연예인이 그걸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그나저나 굳이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않고 유명 교회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뭔 마인드일까?? 스스로 사이비라고 인정하겟다는 것인가?? 참으로 궁금한 마인들이다….

<원글>

워싱톤신학대학을 10여년간 이끌어 오늘을 있게한 김호식박사 이름을 자꾸 달라스 장로교회 원호식박사와 혼동해서 찾다보니…

벌써 6대 총장을 맞아 대학이름은 버지니아의 워싱톤 대학으로 개명을 하고 정규대학으로 성장한 모양이다.

미국에는 당연히 신학대학이라는 것이 없어서 신학대학원은 뭔 유명한 미국인의 이름를 딷다.

그리고 82년도 조직 설립을 위해 일하셨다는 분이 김현철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워싱톤지역 첫 교회인 워싱톤침례교회 김현칠 목사님인것 같다.

오마니가 초기에 볼티모어 박목사님 차를 얻어타고 다니면서 공부를 하셨는데 졸업은 하셨는지?? 하셨다면 어디 졸업사진이라도 있을텐데???

85년도 경이면 70.. ㅎㅎ 70의 나이에 신학대학을 다녔으니… ㅎㅎ 정말 그 정렬이 대단하시다. 세월을 잘 만났거나 자식 복이라도 있으셨다면 뭔 여성장관은 하나 하셨을 텐데…

아바이도 70에 운전을 배우시고 오마니 돌아가시기 까지 그 운전수 노릇을 무사히 하셨으니 하나님의 큰 축복이시다. ㅎㅎ

보고싶은 부모님!!!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연역>

1982년 9월 교회 사역을 위한 평신도 사역자들과 목회자들의 연장 교육을 위해 개교, 김현칠 목사

님을 이를 위한 착수, 조직과 설립을 위해 일하도록 임명.

1982년 9월 Dr. Roy Godwin이 워싱턴 D.C Wisconsin 침례교회에서 처음 문을 연 본 학교에 초대

학장으로 임명

1984년 김호식 박사가 두번째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984년 5월 Falls Church에 있는 Columbia 침례교회로 이전.

1984년 주정부 고등교육부로부터 교육원과 비영리 단체의 인준.

버지니아 고등 교육국은 본교가 다음의 학위를 수여 할 수 있도록 인준 준학사(A.D),종교 학사

(Th.B), 기독교 교욱석사(M.R.E), 목회학 석사(M.Div) 그리고 목회학 박사(D.Min).

1993년 3월, 미국 이민국(INS)으로부터 해외 학생들에게 I-20를 발행 인가 취득 .

1997년 5월, 김동완 박사가 제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학교 건물 자금을 위하여 ESL Program을

신설.

2000년 5월 워싱톤 침례대학교의 조직 개편에 따라 이원희 박사가 학장 서리로 임명.

2002년 5월 이 종욱 박사가 제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Annandale에 건물을 구입함에 따라 학교

를 이전

2004년 2월 본교의 이름을 워싱턴 침례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따라서 학교 대표의 명칭을 학

장에서 총장으로 바뀜

2004년 6월 본교는 ATS에 준회원 학교로 가입.

2006년 7월 신석태 박사가 제5대 총장으로 취임

2007년 1월 워싱턴 침례대학교 Divinity School이 ATS 정규 회원 후보 학교 자격을 취득함.

2009년 8월 장 만석 박사가 제6대 총장으로 취임

워싱톤 DC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한국 최초 침례교회 남현자 사모 180411

한국 최초 침례교회 – 강경침례교회 남현자 사모
침례교역사- pic

2018-04-11 11:18:21

추석을 앞두고 영글어 가는 가을풍경은 우리들 마음의 영원한 그리움의 그림이다. 그러한 행복한 풍경화 속에서 갑자기 48시간의 제한부 전쟁선포에 나라 전채가 검은 구름에 쌓여 “이땅을 전쟁 위기에서 구하소서” 교회마다 기도소리 하늘을 향하여 울려 퍼졌고 목함지뢰와 포격 도발로 야기된 남북간 대치로 긴장감이 흘렀을 때, 주님의 뜻은 어디에, 여러 가지로 번민 속에 평화를 위해 기도하던 남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여름의 꽃 7월에서 9월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3개월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오랫동안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이기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도 부른다. 이 꽃이 많은 곳은 논산과 강경 근처이기 때문에 침신대가 목동에 있을 때 교정 안에서도 여름이면 분홍색 백일홍 배롱나무를 잊을 수가 없다.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푸른 잔디의 배경으로 그리움의 꽃이기도 하였다.
새로 시작되는, 필리핀의료선교회 컨퍼런스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고향의 땅을 밟게 되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배롱나무꽃이 핀 숙소는 논산교회 근처 갑동호수가의 아름다운 전경으로 모두 행복한 미소가 흘렀다. 이튿날 선교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강경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 이 제목은 논산시 강경읍에서 만든 기독교성지 순례코스다.
기독교 성지 순례코스를 중심으로 본 강경지역 역사문화 탐방코스로 “우리나라최초의 강경침례교회” “최초의 사립 만동학교와 최초 유치원 설립제일 감리교회” “최초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결교회” “한국 현존의 한옥 북옥감리교회” “6.25전쟁 66명 순교현장 병촌성결교회” 5교회를 성지순례코스로 2005년 논산시 강경읍 소도시 가꾸기 사업으로 복원해 놓았다고 하였다.

강경교회의 연혁에서 1896년 2월에 파울링 내외분 아만다 가데린 선교사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를 1895년에 전도하여 서울에서 침례를 주고 겨울철 금강의 결빙이 풀려 뱃길이 열리자 강경으로 내려와 1896년 2월 9일 주일에 강경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성도의 자택에서 강경침례교회를 세우고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양과 지병석성도와부인 천성녀 성도 다섯 분이 예배를 드림으로 한국침례교회의 첫 교회로 설립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1897년에 파울링 선교사가 지병석성도집 바로 옆 137번지에 교회를 신축 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 좌석이 분리되어 예배를 보았다고한다.
1906년 10월 6일에 최초의 침례교단 발족 대화회총회가 있었고 1943~1945년 8월까지 일본인들이 신사당 건축으로 교회를 강제 철거하여 폐교하고 토지를 몰수(4732평)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10월9일 홍교동 114번지 일본인들의 사찰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3대 담임목사님으로 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의 출발점을 만들어 주었고 1935년 12월8일 26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오시어 45년 동안 한국기독교회의 초석을 놓아 주시고 일생을 헌신하시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펜윅선교사 후임으로 조국광복 후 이종덕 목사님께서 강경교회 4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시어 6.25동란에 순교하셨다. 이런 시(詩)가 있다. “금강에서” 미루나무 줄지어 선 강가/밤마다 달맞이꽃/가득 피어 있는 내 고향/나루터에는 뱃사공 아저씨/배 떠난다 부르는 소리/겨울이면 강물이 꽁꽁 얼어/얼음 사이로 노저어 갔고/여름이면 홍수져 배가 떠내려가는/갈대숲 둔덕에 앉아 시를 적었다/어느해 이른 봄날/고향에 가니 모두 떠난 빈 자리에/나루터는 보이지 않고/차량들이 줄지어 콘크리트 다리를/넘나들고 있었다. 나의 고향 강경과 세도의 금강을 이야기한 글이다.

이번 성지순례의 길에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소녀시절의 꿈 많은 풍광 속에 언제나 그리워하던 강경산(江景山) 옥녀봉의 그 옛 동산의 느티나무를 볼수 있음에 감개무량하였다. 그 옥녀봉 공원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부여군 세도면의 사람들은 이십리 길을 걸어서 금강 나룻터에 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매일 통학해야했다.

여유가 있는 가정은 다행히 여학생은 학교 안에 기숙사가 있어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할 수가 있었다. 기숙사가 아니면 강경에 하숙하거나 자취를 하기도 하였다. 기숙사에는 200명이란 인원이 제한되어서 부여나 서천 한산 양화 금강 건너 있는 면소재지의 여학생들은 기숙사를 선호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숙사에서 6년동안 생활하면서 토요일에 고향집으로 가지 않을 때는 강경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 토요일에는 학생회를 출석하였다. 그때 여학생회장은 2년 선배인 인기 연기자 강부자 언니였었다.

교회당이 절을 변경 시켰기 때문에 기와지붕이 절모양 이어서 교회당 모양세 치고는 잊혀 지지 않는다. 1971년 11대 유흥태 목사님때 지금의 교회 터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여중때는 내 옆자리에 연혁으로 보니 7대 김장배 목사님 따님 김계자 친구가 있었고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다.
여고시절에는 같은 반으로 8대 윤덕훈 목사님의 딸 윤정자가 있었다. 친구도 간호사가 되어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침례교의 최초 교회에 출석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우리 세도침례교회는 칠산침례교회에 다니시던 김만근 장로님께서 개척하신교회이다.

그 장로님은 어릴 때 우리는 심방오시면 “하나님이 오신다”고 할 정도로 신앙심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셨다. 신학시절에 그 어른의 아버님이 김희서 순교자이라는 것을 구전으로 들었다.
아침 저녘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가을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섭리를 거슬려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 된 한국교회의 기도로 ‘평화’의 응답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의 잠정적인 평화일까란 물음표가 붙는다. 그래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은 ‘북한선교’이다. 복음의 빚 진자로써 복음증거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 침례교 총회와 목회자들이 선교에 올인(AII IN)하시는 사역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행복한 동행이라 생각한다.

남현자 사모 /목산문학회 전 회장

고침) 1935년은 펜공부가 돌아가신 해이다. 펜공부는 1889에 내한했고 1893년 고든 박사에게 신학공부와 선교보고차 미국 보스턴의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의 집회로 이교회의 씽 집사가 자신의 딸 엘라를 기념한 「엘라 씽 기념선교회」가 조직되고 이선교회가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양”를 조선 코리아에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혹 많은 사람들이 펜위익선교사와 파울링 선교사 선교팀을 서로 다른 별개의 조직?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파우링선교사팀은 펜위익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꺼나 새로 쓰여진 우리의 자랑 대전 침례신학 대학의 기원은 울 오마니가 졸업하시고 펜위익선교사 부인이 세운 원산성경학습원(사실은 여성들만 위한, 어떤분김성녀권사는 여성찬양팀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간증..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여사가 리더) 과 이 강경침례교회 성경공부반을 그 기원으로 한다고 공식적으로 쓰여져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