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쫑히와 정인숙 그리고 워싱톤 한인회장 노진환 170905

빡쫑히와 정인숙 그리고 워싱톤 한인회장 노진환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5 11:52:59


▶ ‘이제는 말할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3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노진환의 삼선개헌 지지광고 

미 당국은 통일교와 한국 중앙정보부의 유착관계에 주목했다. 또 수지 박을 KCIA가 미 의회에 위장 침투시킨 여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한미관계의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역이었다. 그리고 워싱턴한인회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던 노진환과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이던 존 E. 니데커(Nidecker)가 조연을 맡았다. 
사건은 노진환(魯璡煥)의 원맨쇼로 시작됐다. 1928년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한 노진환은 1968년부터 ‘워싱톤재류한인회’(현 워싱턴한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인회장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국의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속셈으로 보였다. 
1969년 워싱턴 한인사회는 깜짝 놀랐다. 서울의 한국, 동아,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에 ‘호소문, 박정희 대통령 7.25 성명을 지지하면서’란 광고가 실린 것이다. 광고를 낸 주인공은 바로 ‘재미 워싱톤 교포회장 노진환’이었다. 
당시 한인사회는 3선 개헌 반대시위로 뜨거울 때였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는 노진환의 3선 개헌 지지 광고에 한인들은 격분했다. 

노진환이 한국의 신문에 낸 호소문.


노진환의 샌프란시스코 1인 시위 

노진환의 친정부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다. 박 대통령이 머물던 호텔 앞에 노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팻말을 들고 개헌 지지 1인 시위를 벌였다. 교포사회를 대표한 것처럼 워싱턴 한인회장이 친정부 시위를 한 것이다. 
그 장면을 박종규 경호실장이 목격하고 노진환을 불렀다.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혼자 시위를 하느냐?”

“저는 워싱턴 교포회장으로 홀리데이 인 호텔 미국 총 지배인을 하고 있으며~.” 
물론 노진환이 워싱턴 지역에서 홀리데이 인 호텔 매니저를 한 것은 맞지만 한 호텔이었지 전국 지배인은 아니었다. 
65년 내가 워싱턴 유학생회 회장을 할 때다. 8.15 광복절 경축행사를 노진환이 매니저로 있던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김현철 주미대사는 물론 6.25전쟁을 겪은 무초 전 주한 초대 미 대사, 그리고 미국인들과 유학생, 교포들이 참석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를 알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워싱턴에 머물다 귀국해 살해당한 정인숙.


그의 과장된 자기 선전을 박종규는 귀가 솔깃해 들었다. 박종규에게 노는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대단한 인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교포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인회장이 샌프란시스코 호텔 앞에 나타나 지지 시위를 벌이니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박종규는 경호실 자금을 그에게 주며 대미 로비 역할을 비밀스럽게 맡겼다. 그렇게 노진환은 박 정권의 권력 실세이던 박종규와 줄이 닿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노진환을 용서하지 않았다. 8월30일 한인회 임시총회가 소집돼 호소문 게재 경위를 조사하고 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노는 한인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무렵 우연히 DC의 어느 백화점에서 노를 만났다. 저 멀리서 노진환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노에 대한 평판이 워낙 나빠 인사를 하기 싫어 못 본 체 했다. 그런데 그 옆의 여인이 눈길을 끌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 있나” 할 정도도 발군의 미녀였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노진환이처럼 별로인 위인이 어떻게 저처럼 예쁜 여자를 데리고 다니지?” 
얼마 뒤 신문에서 그녀의 사진을 봤다. 마포 강변에서 죽은 정인숙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여인이 백화점의 그 여자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인숙은 노진환이 69년 10월경 워싱턴에서 잠시 데리고 있었다. 정인숙은 뉴욕으로 간 후 한국에 들어갔다 변을 당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와 니데커 특보 

얼마 후 노진환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대하던 권력의 세계로 다가간 것이다. 노는 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29번으로 출마했으나 당선권 밖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72년 1월 황종률 의원이 사망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했다. 
73년에는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발탁됐고 76년 다시 유정회 의원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의 든든한 배경은 박종규 실장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워싱턴 출신인데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국회의원 노진환의 또 다른 힘이 되었다. 기독교도 그는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노와 여러 한국 국회의원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노진환은 이 행사에서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던 니데커를 만났다. 그는 69년 5월부터 백악관에서 의회 연락과 학생들이나 종교단체와 관련된 연락 및 재정지원을 담당했으며 조찬기도회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노는 이 백악관 참모를 만나 천부적인 사교술을 발휘했다. 니데커의 환심을 산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조찬기도회에 그를 초청했다. 

박종규가 준 봉투 

1974년 4월 29일 니데커와 백악관 고문 목사인 클립턴 로빈슨 목사 등은 한국을 찾았다. 백악관 특보를 맞은 한국은 대통령 급에 준하는 예우를 하며 그를 환대했다. 호화스런 호텔이 제공되고 박종규의 경호실 요원들이 그를 모시고 다녔다. 
박종규의 주선으로 박 대통령도 면담했다. 박 실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니데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거기에는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라 적혀 있었다. 백악관 참모가 졸지에 한국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 된 것이다. 

안내는 노의 몫이었다. 그는 니데커가 머문 호텔 스위트룸 바로 옆에 묵었다. 
니데커가 귀국할 때였다. 노진환이 그를 청와대로 데려 갔다. 박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박 대통령은 없었다. 박종규와 골프를 치러 나간 것이었다. 

공항으로 가려는 그에게 박종규의 부하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박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뭔가 싶어 봉투를 살짝 뜯어보았다. 
현금이 보이자 그는 깜짝 놀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주한 미 대사관 직원에게 봉투를 전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투 안에는 1만 달러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백악관 참모를 한국에 데려오면서 노진환의 주가는 올라갔다.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 

한참 후 노진환은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백악관을 방문해 니데커를 만난 그는 은밀하면서도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당신들 연방의원 선거 치르는데 한국에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하원의원 출마자에게는 3천-5천 달러, 상원의원에는 1만-3만 달러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주면 좋을지 추천을 해주세요.”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에 니데커는 귀를 의심했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국회의원이 미국 선거에 돈을 대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와서 말이다.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외국인도 선거자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다만 외국 정부의 자금은 불법이었다. 나중에 박동선도 미 의원들에 준 자금을 한국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제공한 것이라고 말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니데커는 단박에 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노진환을 밖으로 쫓아냈다. 

내 후임이던 박종규와의 인연 

몇 년 후 미국 신문에 폭로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가 미 의원 선거에까지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에 미국민은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불법적 행태에 대한 보도들이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 한국의 이미지는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박종규는 워싱턴 포스트에 반박문을 기고했다. 

“니데커가 나를 만나자고 해서 잠깐 만난 것 밖에는 없다. 돈을 준 적도 없다.”
박은 니데커와의 만남이 별 것 아니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관련설을 부인했다. 
니데커는 78년 6월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박종규는 사실 나의 군 동료였다. 유재흥 장군이 육군참모차장으로 있을 때 내가 부관을 3년간 지낸 적이 있다. 당시 박종규 소령은 유 장군 집무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게다가 내 후임으로 박종규가 부임했다. 그는 괄괄하고 단순한 성격이었지만 나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 올 때 유일하게 송별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5.16 당시 박종규(왼쪽)와 박정희.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후 박종규가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 근교인 알링턴의 한 호텔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옆에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바로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노진환이었다.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마치 박종규의 부관처럼 앉지도 못하고 옆에 시립해 있었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그가 워싱턴을 다녀간 후 코리아 게이트가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 

퀘이커 평화운동 주의자 엘리스 보올딩 여사 170906

퀘이커 평화운동 주의자 엘리스 보올딩 여사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6 13:16:40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 엘리스 보올딩 여사가 우리 앞에 나타난것은 왠일인가??

1990년 미국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ee 에 의해서 Nobel Peace Prize 후보에 추천되었으나 노벨상을 타지는 못했다.

1991년에는 우리 남침례교의 자랑이신 카터 대통령이 후보에 올랐다.

The Spirit of Ma’at, Volume 1 No. 5 “The Futurists Creating Peace”

Peace: The Untold Story

with Dr. Elise Boulding
by Susan Barber

Elise Boulding, PhD has been an important peace activist since World War II. Author of eleven books (see book list) and contributor to many more, she built the Peace Studies program at Dartmouth College, and both she and her husband, Dr. Kenneth Boulding, were active all their lives in conflict-resolution studies and in the more important groups that have been working for world peace. Although she has been retired for some time, and was widowed in 1993, Elise Boulding spent the mid-nineties writing Cultures of Peace: The Hidden Side of History (see Source Books). And she still makes her peaceful presence felt in the corridors of power.

We called Elise Boulding at her home in Massachusetts, near Boston, in order to learn about peace efforts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to gain her experienced perspective on where the world is tending now. But perhaps even more importantly, we wanted to paint for our readers a portrait of one woman’s life dedicated to creating a world in which children might feel safe.

No Safe Place on Earth

The course of Dr. Boulding’s adult life grew out of a childhood perception. “I was born in Norway in 1920,” she said, “and we came to this country when I was three. My early memories were of war movies, and Mom being homesick for Norway.” As a little girl, Elise was frightened by the images of war, so she decided on a plan. If war broke out again, she would return to Norway. The peaceful homeland for which her mother longed. Where she knew she would be safe.

“Then came World War II,” she said, “and the invasion of Norway. And that was when I realized that there was no safe place on earth. And I knew that I had found my life’s mission.”

Like all of the thousands, perhaps hundreds of thousands, of peace-people who are truly making a difference, Dr. Boulding has primarily focused on what’s right with the world, not on what’s wrong with it. Rather than opposing war, she has studied what can be done to prevent it – how to resolve conflicts without fighting.

“We Had No Sense of Strategy”

During and after WWII, Elise Boulding began to become involved in various efforts to bring an end to all wars. She became a Quaker, and she and some of her fellow “witnesses against war” wrote what she calls a ”seditious public letter.” The letter simply said that we should not be in the war, that people should just lay down their arms. ”We had no sense of strategy. And we expected to go to jail. But nobody paid any attention to us.”

Soon, marriage and five children captured most of her time, but she remained active during her childbearing years, teaching peace to children and participating in activist projects of the fifties. She also joined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 and started a newsletter to unite women in behalf of world peace.

”When we went to Japan for a year, from 1963 to 1964, my kids were in school – they used to walk to school through the rice fields. I had some time, so I decided to find out how things work. In those days, Japanese women were demonstrating in the streets.”

But the research she sought to undertake needed resources, and she could not obtain them with her master’s degree. So upon returning to the states, she took a PhD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Then I could get funds. It made a ridiculous amount of difference,” she said.

The Dartmouth Years

She was in the Sociology Department at the University of Colorado when Dartmouth College invited both Elise and her husband, Kenneth, to become Scholars in Residence. This program offered room and board plus a stipend; all they had to do was spend the year talking to students and faculty.

Although Kenneth eventually returned to Michigan because of the research staff he had there, Elise Boulding remained behind at Dartmouth, where she chaired the Sociology Department and developed the college’s Peace Studies program. ”We had a long-distance marriage,” she said. ”And we were both traveling so much, we were just as likely to run into each other in some foreign city as anywhere else.”

”Some . . . Have Lost Their Husbands
and Children to Each Other’s Men”

When asked what she felt was the most important thing to creating world peace, Dr. Boulding answered without hesitation. ”We need more women in decision-making positions, both in government and in the public sphere.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Dr. Boulding talked of an Africa-wide peace council, an offshoot of the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Reconciliation, that includes groups of women in every country in Africa. ”These women are always in contact with each other,” she said. ”Some of them are being trained to work with the elders, to point out to them the ways that exist already in their traditions to resolve conflicts in a peaceful way.

”They are saying to the elders, ‘We have to sit down in a circle and talk.’ These are ways that the men have always known and have forgotten. Some of these women have lost their husbands and children to each other’s men. Yet they come together, to share, and to strengthen each other.” Wherever there is genocidal conflict in Africa, Dr. Boulding said, these women are there, too, trying to end it.

”The Women’s Movement has worked hard, but other countries are way ahead of us,” Dr. Boulding says. ”And it’s been proved in all peace organizations that when women are in a coordinating role, it works better. I don’t think this is a genetic thing. It’s cultural. Partly, I think, it’s because women’s culture involves a lot of listening.”

”There is a generation of women who are full professionals coming into conflict resolution,” Dr. Boulding said. ”This new cadre of women can change the direction of how we handle conflict. We’re learning to create the governing structures that would make disarmament possible.”

A hopeful thing that’s happened recently, Dr. Boulding said, is that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has finally acted upon the knowledge that women are more effective than men at this peacemaking business. ”After years of effort trying to make this happen, the U.N. have finally made it an official policy to have women on all peace projects,” she said (see U.N. Resolution 1325: A New Landmark Initiative for World Peace).

The Back-and-Forth People

The second most important thing to improving efforts at peace, according to Dr. Boulding, is for us to become aware of the sheer size of the peace effort that is happening in today’s world. If we knew what was actually happening – how many thousands of individuals and groups were working to create peace – this in itself, she feels, would change world consciousness.

And the peace-seekers do not have an easy job. one of the big stumbling blocks, she said, is that representatives to the United Nations and other bodies do not usually have the power to sign agreements. ”Every little change requires an intensive process, back and forth. The representative goes home or across town and talks to his own country’s officials, then returns to the conference table, then it’s back to his own people, and back to the conference table, on and on.”

Dr. Boulding paints us a vivid picture of the huge cadre of dedicated civil servants spending their lives in taxis, on buses and airplanes, or walking – from country to country, city to city, hotel to hotel, room to room – all trying to bring peace to our planet.

”The only reason any positive change ever comes about is because of these thousands of people, going back and forth, back and forth. And the only way they can do this is that they have a Vision.”

This, Then, Is the Untold Story

Until we ourselves at the Spirit of Ma’at began to research the world’s efforts to create peace, we had no inkling of the sheer size of the peace movement. The subject of peace has become bigger than the subject of war – the reason it doesn’t seem so is that it’s not reported in the media.

The great, untold story of the peace movement is how many people and organizations are involved in it. Not only people, but newsletters, conferences, councils, committees, elderly groups, youth groups, celebrities, art, music, websites. The untold story is the sheer weight of the numbers of those who have the vision of a world without war.

What we need, Elise Boulding insists, is more awareness of what’s going on. Identify the players. Realize the expenditures of energy.

Give them energy, she urges.
Pray for them.
Know that they exist.
And if it’s yours to do —
become one of them.
Dr. Boulding concluded by describing a Buddhist worship service that she attended during the holidays. ”I could see the whole room – several thousand people. And I was thinking, ‘These are my neighbors, and I never see them.’ We were chanting together, lifted in the Spirit together, to a new place.

”I remember reading in the New York Times about biomusic – how human beings did not invent music, every living thing makes music.

”I love to think,” she said, ”of all the world singing. Every living thing.”

Books by Elise Boulding, PhD:

The Future: Images & Prophecies, Sage Publications, Incorporated(1994) [with Kenneth Boulding]; One Small Plot of Heaven: Reflections on Family Life by a Quaker Sociologist, Pendle Hill Publications(1993); New Agendas for Peace Research: Conflict & Security Reexamined, Rienner, Lynne Publishers, Incorporated(1992); Building a Global Civic Culture: Education for an Independent World, Syracuse University Press(1990), Peace & Conflict Resolution (Paperback) Series; Women: The Fifth World, Foreign Policy Association(1980), Headline Series; Children’s Rights & the Wheel of Life, Transaction Publishers(1980); The Family As a Way into the Future, Pendle Hill Publications(1978); The Underside of History: A View of Women Through Time, Sage Publications, Incorporated(1992), Westview Press(1976), Westview Press(1977); Born Remembering, Pendle Hill Publications(1975); Children & Solitude, Pendle Hill Publications(1962).

박정희의 현충사 현판 떼라-충무공 후손 170914

박정희의 현충사 현판 떼라!!! 충무공 후손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14 07:56:37

일제가 박은 대못은 뽑는다고 난리를 치면서 친일독재자가 충무공을 희롱하고 개구덜이 각종 단체를 만들어서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을 희롱하고 심지어는 각 독립투사 유공자 후원단체라고 만들어서 희롱하는데도 좋다는 궁민덜… 그들이 민족정신을 희롱할때는 항상 ‘빨갱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쒸웠지!!!! 그래도 좋단다!!! 에고 그나저나 빡쫑히가 충무공 뒤뜰에 심었다는 그 일본 금송은 아직도 잘있나?? 에고….

우주 팽창 빅뱅은 천지창조 171103

우주 팽창 빅뱅은 천지창조
년도별/퍼온글

2017-11-03 10:43:57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머무는 우주인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교황은 우주인들에게 “우주 속 인간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우주생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세상을 신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우주인들에게 부러움을 표하면서 20분간 우주인들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원래 로마 교황들의 우주에 대한 관심은 오랜 전통이다. 자신들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의 대학 동문이었던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모질게 박해한 것도 교리 문제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가 “성서는 하늘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줄 뿐이며, 하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라고 항변했지만, 끝내 종신 연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과학을 억압했던 기독교이지만, 20세기 들어서 세불리를 느끼자 더이상 저항을 멈추고 과학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침 나타난 빅뱅 이론이 기독교에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되어주었다.

영원 이전부터 우주가 존재했다는 정상 우주론은 한마디로 ‘반기독교적인 우주론’이었다. 기독교에서 볼 때 가당찮은 주장이었다. 영원 이전이라니, 우주는 분명 하나님이 6000년 전에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잖은가.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한 공직자 후보가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 말해 세상을 경악시킨 일이 있었다.

성서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빅뱅 이론이 바로 이 천지창조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도 시작이 있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더욱이 이 빅뱅 이론을 맨먼저 주창한 이는 벨기에 출신의 천문학자인 가톨릭 신부였다. 조르주 르메트르.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다가 1차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후 인생 항로를 크게 틀어 천문학자가 되었다.

우주가 탄생한 날은 ‘어제 없는 오늘’

수학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에 나오는 중력장 방정식을 깊이 연구한 끝에, 우주는 과거 한 시점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팽창우주 모델’을 세상에 선보였다.

빅뱅이론의 아버지 르메트르. 평생 ‘신의 길’과 ‘과학의 길’을 같이 가기로 결심한 후 천문학자로 빅뱅이론을 주창했다.

빅뱅이론의 아버지 르메트르. 평생 ‘신의 길’과 ‘과학의 길’을 같이 가기로 결심한 후 천문학자로 빅뱅이론을 주창했다.
르메트르는 후일 빅뱅 이론으로 발전된 ‘원시원자’(primeval atom) 개념을 도입하여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의 기원, 즉 그가 ‘어제가 없는 오늘’(The Day without yesterday)이라고 불렀던 태초의 시공간에 도달한다는 선구적 이론을 펼쳐냈다.

1927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세계 물리학자들의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팽창우주 모델을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당신의 계산은 옳지만, 당신의 물리는 끔찍합니다”라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 아인슈타인이 거부한다는 것은 곧 전 과학계가 거부한다는 뜻으로, 르메트르는 자신의 이론에 흥미를 잃고 한동안 잊은 듯이 지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929년 혜성처럼 나타난 미국의 신참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관측 증거를 내놓았다.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20세기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빅뱅 이론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르메트르의 팽창우주 모형, 즉 원시원자 이론이 유신론의 증거로, “성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주었다”고 선언했다. 르메트르는 이 교황의 말에 크게 화를 내며, 개인적으로 종교와 과학을 섞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아직 빅뱅 이론이 정상 우주론과 치열한 논쟁을 하는 중으로, 교황의 개입이 오히려 빅뱅 이론을 궁지로 몰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레드 호일 등 정상 우주론자들은 르메트르를 비판하면서, 가톨릭 신부 교육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그의 관점을 왜곡시켜 원시원자 이론이 성서의 창세기에서 ‘창조’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고 공격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팽창하는 우주라는 개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개 신부의 신분이었지만 르메트르는 빅뱅 이론을 종교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삼가줄 것을 교황에게 건의했고, 그후 비오 12세는 두번 다시 빅뱅이 창세기의 천지창조라는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르메트르가 ‘솔베이의 절망’을 맛본 지 6년 만인 1933년,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항복을 받아냈다. 우주 팽창을 발견한 허블의 윌슨산 천문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르메트르는 에드윈 허블을 비롯한 쟁쟁한 천문학자와 우주론자들 앞에서 빅뱅 모델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불꽃놀이를 가미하여 현재의 우주 시간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의 최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폭발이 있었고, 그후엔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창조된 생일의 장관을 보기엔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팽창우주 강의를 듣고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 창조에 대해서 가장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설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빅뱅 이론과 정상 우주론의 승부는 르메트르가 말한 ‘태초의 휘광’의 증거물이 1965년에 발견됨으로써 결정되었다. 바로 대폭발의 화석이라 불리는 우주배경복사였다. 미국 물리학자 펜지어스와 윌슨은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으로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지금도 우리는 우주배경복사를 직접 볼 수 있는데, 방송이 없는 채널의 텔레비전에 지글거리는 줄무늬 중의 1%는 바로 그것이다. 138억 년이란 억겁의 세월 저편에서 달려온 빅뱅의 잔재가 당신 눈의 시신경을 건드리는 거라고 생각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빅뱅이 과연 신의 ‘천지창조’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답은 이렇다. 인과(因果)에는 반드시 시간이 개입되며, 시간 역시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묻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질문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빅뱅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임종을 앞둔 르메트르에게도 전해졌다. 평생 신과 과학을 함께 믿었던 빅뱅의 아버지 르메트르는 1966년 우주 속으로 떠나갔다. 향년 72세였다.

47살 보잉 747 마지막 비행 은퇴 171109

47살 보잉 747 마지막 비행 은퇴 – 2017년 11월 7일 베터랑스 데이

나의 이야기

2017-11-09 09:04:30


Image result for boeing 747-400
Image result for boeing 747-400

태평양을 건널 때 타던 보잉 747.

바로 지난 화요일 2017년 11월 7일 미국의 베터랑스 데이 날, 유나이티드 항공 하와이 호노루루 공황에 착륙을 마지막으로 47년 간의 휘황찬란 했던 역사를 되로 하고 퇴역했다.

1969년 세계 최초의 점보 제트기로 항공여행의 진정한 혁명이었다.

용량으로나 거리로 볼때 ..

12월에 델타 항공이 미국내선으로는 마지막이 될것 이지만 국제선에는 화물 케리어로 몇십년은 더 운행할 것이다.

1991년 오레곤 교회 주소록 191111

1991년 오레곤 교회 주소록

오레곤

2017-11-11 07:15:48


정부 사찰이 가능한 다음이나 카카톡은 또 누구의 영향 하에 들어 간것일까???

문재인정부가 들어온후? 인지 갑자기 검색에 뭘 치면 나오질 않는다.

독재자의 과거 추악했던 이야기들이나 개구덜, 그리고 인명사전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사람이름 한번 치면 교회 주보에라도 나오던 정보들이 싸그리 없어져 버렸다.

전에 살던 오레곤 교회들이 가물거려서 검색해 보니 주소록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어디 주인도 없는 사이트들이 몇개 남아서 보니 거의 20여년전 목사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여러 사연 끝에 우리 남침례교회에 세들어 살던 성서교회도 결국은 쫓겨갔는데 아직도 존재하는지 박성도 목사님은 건강한지??

감리교회도 오광석목사 전전전 쯤 되려나???

오랜 역사의 중앙교회도 많은 풍파가 있어 소교민 목사님이 빈 교회를 지켰지?? 떠나기 전이었나 우리가 다니던 침례교회가 너무 멀어서 수요 예배에 몇번 간적이 있었는데 훵하니 비어서…

지금 한인회가 들어 있는 성결교회…

중국 광주 쪽인가 우리 남침례교단 선교사로 나간 서울대 이현찬 목사님. 우리 큰누이 매형과 같은 시기에 나간것 같다. 13년.

안식일 교회는 뱅쿠버에 있었고 포틀랜드에 건물을 구입하기 전인 모양이네???

우리가 다니전 침례교회 김경주 목사님도 돌아가신지 엄청 오랜데… 주소를 보니 우리가 1991년 쯤 처음 다닌 포틀랜드 동쪽 조그마한 중국교회였던 교회를 사서 예배를 드리던… 첫교회 이다.

업체명주소전화번호
교회 한인성서교회(박성도) 
(KOREAN BIBLE CHU ) 
5755 SW ERICKSON AVE 
Beaverton, OR, 97005
(503)524-5844
교회 인포틀랜드장로교회(김수신) 
(KOREAN UNITED PR ) 
550 NE 76TH AVE 
Portland, OR, 97213
(503)253-8196
교회 한국연합선교교회(김영빈) 
(KOREAN MISSION A ) 
11900 SE STANLEY AVE 
Portland, OR, 97222
(503)654-9272
교회 포틀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양재성) 
( KOREAN UNITED ME ) 
18788 PILKINGTON RD 
Lake Oswego, OR, 97035
(503)684-7070
교회 포틀랜드중앙교회(소교민) 
(CENTRAL CHURCH A ) 
6275 SW HALL BLVD 
Beaverton, OR, 97008
(503)626-6186
교회 포틀랜드제일장로교회(박경걸) 
(PORTLAND KOREAN ) 
2530 SE 89TH AVE 
Portland, OR, 97266
(503)654-2332
교회 포틀랜드성결교회(김진국) 
(PORTLAND SUNG KY ) 
7650 SW 81ST AVE 
Portland, OR, 97223
(503)244-9191
교회 코발리스한인교회(이현찬) 
(CORVALLIS KOREAN ) 
1625 NW GRANT AVE 
Corvallis, OR, 97330
(541)753-9643
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뱅쿠버한인교회) 
( ) 
7012 N E 58TH 
, ,
(360)256-6667
교회 제일침례교회(김경주) 
(KOREAN FIRST BAP ) 
5535 SE RHONE ST 
Portland, OR, 97206
(503)255-7092
교회 임마누엘장로교회 
(EMMANUELLE PRESB ) 
14790 BOONES FERRY RD 
Lake Oswego, OR, 97035
(503)691-0884
교회 오레곤한인교회연합회 
(KOREAN CHURCHES ) 

, OR,
(503)775-0272
교회 오레곤교역자회 
(KOREAN MINISTERS ) 

, OR, OR
(503)654-2181
교회 오래곤선교교회 
(KOREAN MISSION E ) 
9100 SW WILSHIRE ST 
Portland, OR, 97225
(503)292-2294
교회 여호와의증인 
(KINGDOM HALL OF ) 
0240 SW NEBRASKA ST 
Portland, OR, 97201
(503)246-9887
교회 오레곤임마누엘교회(김운영) 
( OREGON IMMANUEL ) 
12170 W STARK ST 
Portland, OR, 97229
(503)526-0691
교회 오레곤순복음교회 
(FULL GOSPEL CHUR ) 
17575 S.W R.V HWY 
Beaverton, OR, 97006
(503)615-3131
교회 삼일한인장로교회(문성출) 
(SAMIL KOREAN PRE ) 
9100 SW 135TH AVE 
Beaverton, OR, 97008
(503)524-3728
교회 새소망침례교회(이원호) 
(NEW HOP KOREAN B ) 
19970 NW MURPHY RD 
Cornelius, OR, 97113
(503)647-2618
교회 사랑장로교회 
(LOVE PRESBY. CHU ) 
582 FENSTER ST 
Eugene, OR, 97401
(541)344-0155
교회 베델장로교회 
(BETHEL PRESBYTER ) 
18370 SW SHAW ST 
Beaverton, OR, 97007
(503)649-3990
교회 링컨시티한인교회(김순기) 
(KOREAN PRESBY. ) 
1461 NE 6TH DR 
Lincoln City, OR, 97367
(541)994-7811
교회 구국기도회 
(GOO KOOK PRAYER ) 

, OR,
(503)760-4965
교회 갈보리장로교회((정재두) 
(CALVARY PRESBY. ) 
16255 NW BRONSON RD 
Beaverton, OR, 97006
(503)690-7943

시, 빛에도 눈물이 있다 – 송명희 171118

시, 빛에도 눈물이 있다 – 송명희
년도별/예술문학비평

2017-11-18 10:02:12

시인을 안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그의 시를 많이 읽거나 연구해 본적도 없고 오랜 시인의 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인을 알게 된것은 기타동우회에서 만나 그녀의 노래를 들은 것이, 기실은 전부이다.

나는 자칭 고아원출신(고아는 아님)이라서 그런지 조금 우아하고 세련된 사람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다.

해서 시인과 말을 섞어나 대화를 나눠 본적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남달랐고,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시가 좋을 뿐이다.

그래서 그때 부터 시인의 시가 눈에 띄면 다시 읽어보게 되고…

그 범상치 않은 시에 유명한 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과연!’하고 감탄 했을 뿐이다.

내가 두려워 하는 ‘우아한 사람들’은 대체로 부르조아적 사고와 이데오르기에 편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나는 기독교인 이지만 내가 잘 알고 가까운, 그리고 나름대로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해서 실망하는 적이 많다.

내가 읽은 시인의 시들은 종교적 표현을 자제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오늘의 시는 마치 신에게 ‘내가 당신에게 가노라’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선언하기 까지도 그 절차가 시원 스럽게 진행된다.

시인의 신앙이 성숙된 것일까???

아니면, 시인의 마음이 선언을 하고 싶은 것일까??

타성에 젖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실망할 수도 있고,

누가 뭐라든 우리는 신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

시이든 삶이든 시원 시원한 것은 시원 시원 한것 같다….

빛에도 눈물이 있다 …송명희

나는 태양을 서너 개 가진
별의 문지기이다
어떤 날은 금빛 햇살로
여기저기 뒹구는 애착을
한나절씩 잠재워놓고
하얀 꿈을 가지런히 다시 고른다

누구의 재물로도 쓰이지 못하는
부유하고 비만한 허욕의 바벨탑
빛의 강물에 소리 없이 던져 버리고
딱딱하게 박힌 불신의 굳은살도
노래하듯 훌훌 떠내려 보낸다

검게도, 희게도 보이는 화폭에
영원한 것의 형태 없는 모습이
붓들의 증언으로 그려진다
보이지 않는 천상의 이야기가
두려움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아니, 긍정으로 바뀌면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또 하나의 빛
예정된 고통의 문턱을 가볍게 사뿐 넘는다

“죽음입니다
종착역이니 내리십시오”

육체의 강을 건너니
도공이 환희의 눈물을 흘리며
손을 내미신다

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겹겹이 쌓인 영생의 시간을
펼쳐 보이신다

녹슬어 땅에 뒹구는
십자가의 울부짖음은
모두 온전한 구원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