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117 자유주의를쓰면서 071116 비가부슬부슬

071117 자유주의를쓰면서 071116 비가부슬부슬
나의 이야기

2007-11-17 03:37:09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 엘에이를 오가면서 옛책들을 꺼내 읽게되었다.

예전의 명작들도 이제는 모두 고전이 되었다.

30년전 모으던 삼성문화문고 몇권이 우연히 나에게 쥐어 졌고…

사실 그중에 읽을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다. 여러개중 뒤져보았지만…

이제는 고전이되어서…

아이들에게도 가끔 그 옛날 명작들을 읽으며 느끼던 감흥을 이야기하지만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작품명이나 직가를 알지도 못한다.

잡학(?)에 도가 깊은 나로써는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걸 어찌하랴?

아이들은 책을 눈에 달고 살지만 가벼운 추리, 미스터리소설 따위같다.

반지제왕이나 요술, 마술이야기 또 심지어는 ‘다빈치 코드’등 그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데 아이들은 쏙빠져있는것 같다.

자유주의는 100년전(1911년)에 쓰여졌는데 민주주의를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우리는 이런 정치,문화에 대한 사고와 검증이 없이 달려오지 아니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우리는 이 ‘100년전의 한 인간의 생각’을 다시한번 해 봐야하지 않나 사료된다.

후후,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서구에 비해 100년정도 뒤떨어 진것일까?

‘자유주의’를 시작하면서 인사말이 너무 길어져서 짤라서 이곳으로 옮겼다.

계속하면, 나이가들면서? 세대가 변하면서, ‘너무 깊은사고를 하면서 읽는 것’은 골치를 아프게 했다.

가벼우면서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추리 소설이다.

한때 연애소설에 관심이 간적도 있지만 금방 시들해 지고 만다.

미국에서 는 사실 젼혀 다른세계과 접촉하게 되는데…

우리가 알던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것은 눈을 비비고 찾아봐야 찾을수가 없다.

이민 초기 25년전, 대학때 심취했던 불란서 작가’루이제린저?’의 책을 영어로 읽어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못찾았다.

심지어는 매릴랜드주립대학 도서관에서 못찾았던것 같다.

헌데, 추리,살인 소설들은 그 수준이 높아서 읽으면 전률을 느낄 정도이다.

또 수준들이 높아서 움베르토 에코등 유명 소설가들은 참으로 세계적인 석학수준같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막 추리소설들이 시작되던시기 였던것 같고…

한국을 떠나기전 이병주씨등 몇 추리소설을 읽어던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송일국이 나오는 드라마 ‘로비스트’를 보면서(여편네가 송일국이를 좋아해서…) 쓴사람이 전혀 경헙하지 못한것을 상상해서 쓴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있다.

하여간 미국에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는것 같다.

세계문학전집을 내가 접할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동창이던 김장환이라는 친구덕분이다.

중학교 무슨 ‘전국고전교양대회’인가 뭔가하는게 있어서 자주 도서관에 모여서 한국고전책들을 읽곤 했는데, 기억에 도서관에 전집은 있질 않았던 갔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였던것 같은데 그냥 단권으로 된 문학소설을 읽을수 있었던것 같다.

재미있는것은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치 ‘춘희’?를 번역한듯한 옛날 소설을 너무나도 감명깊게 읽은적이 있다.

아마도 50년대 이전에 외국소설을 불법번역한 소설책이었던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한국식이고 지명등은 영국이었던것 같다.

상인천이 이전전에 인고와 도서관이 같았으니 그책이 아직도 인고에 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당시 세계문학전집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인데 장환이네는 을지문화사인가 을유문화사 전집이 있었다.

그는 이층 한층를 모두 쓸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축이 있었고 그 전집이 있는 책장이 있었다.

친구들이 거기서 공부는 별로 한적이 없고 레슬링도 하면서 놀곤했다.

나는 특히 그와 친해서 (어머니가 누이 정신여고 3-4년 선배) 가끔 어머니가 계란이 든 라면을 끓려주셨다.

놀고 돌아 올때는 꼭 전집하나를 빌려 오곤했는데, 나는 항상 그 전집을 신문지로 싸서 깨끗히 읽고 돌려주었다.

가끔 내가 깨끗히 읽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신문지를 벗기지 않고 돌려주곤했다.

뭔훗날 그가 물었다.

너 나한테 빌려간책 다 갖고 왔냐?

친구가 많은 그에게, 책은 몇권 남아 있지 않았다.

071117 ‘자유주의’를 쓰면서…

071117 ‘자유주의’를 쓰면서…
나의 이야기

2007-11-17 02:40:44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 엘에이를 오가면서 옛책들을 꺼내 읽게되었다.

예전의 명작들도 이제는 모두 고전이 되었다.

30년전 모으던 삼성문화문고 몇권이 우연히 나에게 쥐어 졌고…

사실 그중에 읽을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다. 여러개중 뒤져보았지만…

이제는 고전이되어서…

아이들에게도 가끔 그 옛날 명작들을 읽으며 느끼던 감흥을 이야기하지만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작품명이나 직가를 알지도 못한다.

잡학(?)에 도가 깊은 나로써는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걸 어찌하랴?

아이들은 책을 눈에 달고 살지만 가벼운 추리, 미스터리소설 따위같다.

반지제왕이나 요술, 마술이야기 또 심지어는 ‘다빈치 코드’등 그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데 아이들은 쏙빠져있는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각설하고…

자유주의는 100년전(1911년)에 쓰여졌는데 민주주의를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우리는 이런 정치,문화에 대한 사고와 검증이 없이 달려오지 아니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우리는 이 ‘100년전의 한 인간의 생각’을 다시한번 해 봐야하지 않나 사료된다.

후후,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서구에 비해 100년정도 뒤떨어 진것일까?

하여간 한번 다시 읽어보자!!

자유주의 홉하우스 삼성문화문고 김대벽

071117 나의 블로그가 완성되다.

071117 나의 블로그가 완성되다.
갖고 싶었던 블로그가 완성되다.

그동안 서버들을 믿을수 없어서 , 하루 아침에 문닫아 버리니…

다음이야 그러지 않겠지?

하하 이제 진짜로 나의 집을 지어 보자!!

주) 이게 언제일까???
아마도 조선 한반도 역사에 처음 서민 민중의 첫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인터넷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 노통이 물러나고 한번더 민주의 세상이 한번더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이 만고에 남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ㅋㅋㅋ
그러나 그런 희망?과 기대는 조선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여지 없이 깨지고 만다,
돈에 눈먼 넘들이 항상 그들의 양심을 팔아 먹었듯이…

그래도 다음은 반석위의 집이 될줄 알았다….ㄷㄷㄷ

그러나 그것은 반석이 아닌 모래위의 집이었다.
사이비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클리닝에 맞서 싸우던?? 다음은 순식간에 사찰이 가능해지고…
클리닝 센터라는 곳에서는 어떤 판결없이 이메일 한통으로 삭제하는 만행??들이 행해졌다.

어느날 갑자기 내 블로그가 없어져 버렸다.
카카오와 통합되기전 히스토리인가 뭔가와 무슨 연계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것에 둔해 졌을 나이가 이미 되기도 했지만 사찰과 해킹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네트워킹을 쓰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하여간, 블로그가 없어져서 오랜동안 보지 않던 이메일을 열어보니 딱! 3개월 전에 경고를 보낸 모양이다.
세월이 유수처럼 흐르는 나이도 되었지만 요즘 달나라에 갔다오는 시대에 누가 이메일을 본단 말인가??
지네는 이메일 못쓰도록 카카오를 유행 시킨 넘들이 아닌가 ???

그런데 달랑 3개월 경고문을 보내고 15년을 해온 내 블로그를 한 순간에 없엔단 말인가???
이게 뭔 친일군사독재란 말인가 공쌴 빨강이 짓이란 말인가???

매일보는 뉴스에도 어떤 경고도 소문도 듣지 못했다…
옛날 컴퓨터를 공부하고 네트워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이런 것들을 시작한 유명인들은 네트워크 또는 인터넷 선서??? 뭐 이런 선서문을 만든 것을 본적이 있다.
인터넷은 자유롭고 어떤 정치, 국가에 예속되지 않는… 뭐 이런…

그 양반들이 다 어디서 뭘하는 지는 모르지만..
통신통제 기관들이 권력에서 나와서 권력의 시녀 역활을 하는 동안 믿엇던 지식인의 양심…
자유로운 시대가 되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될것 이라는 기대는 또 다른 정신적 폭력과 독재사기로 무너져 간다…

대한 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최고 엘리트 였던 최추봉 선생이 소천하기전 써 놓은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는 글이 새삼 눈에 들어 온다…

글도 잘 쓰시던 최추봉 선생은 작고 후 그리고 다음의 만행으로 인해 그 블로그는 사라졌고 그의 글도 다 사라져갔다.
어떤 넘들이 계획하고 주도 하는 것일까???
마치 진시황이 책을 다 불태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노력인지…
그러면 그들이 만행이 다 지워지리라 믿는 것일까??? 후후후 어림없는 소리!!!

이산가족 상봉 2015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Greeting, Family.

지난 1년 반은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In the last a year and half, some big things happened.

정확하게 1년 반전 2013년 9월 나의 사촌이 10년쯤 탈북하여 남한에 있다가 나를 찾아내서 서로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Exactly one and half years ago, in the September of 2013, my cousin who escaped from North Korea to South Korea about 10 years ago found me through the Internet.

그리고 한국의 TV 방송국KBS의 유지열 피디와 공조로 러시아에 아직 살아 있는 할머니(김덕희) 의 유일한 사촌을 찾게되었습니다.

Korean TV KBS Ryu Ji-Yul PD found grandmother’s (Kim, Deok Hee) only cousin in Russia to make a Korean migration documentary with our information.

나의 사촌은 대학졸업 전후 러시아의 이모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 받고 심지어는 동생이 벌목공으로 러시아에 가서 직접 이모할머니 집을 방문한바 있어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When my cousin was in college, she exchanged letters with my grandmother’s sister’s family, and her younger brother visited them when he went to Russia as a logger. Because of this, we were able to learn many things we didn’t know about my grandmother’s sister’s family.

나의  백부 김새협의사와  그들의 이모부 전홍섭의사는 일본제국시대초기 이던 1910년대 말 독립운동을 하여 1963년 남한 정부로 부터 상당히 높은 훈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의사 is not as a Doctor but as a Goodman for Nation like a hero)

The father of grandmother’s cousin, Jeon Hong-Seop (Ten in Russian), and grandmother’s oldest brother, Kim Sae-Hyup, received a significantly important Medal of Merit for Korean National Foundation from the Korean Government in 1963 for fighting against the Japanese Empire in the late 1910’s.

이번에 찾게된 러시아의 전아브로라  아주머니 가족과 탈북 사촌 김 분선은

우리들의 유일한 친척들입니다.

So far, Aunt Ten Abrora’s family in Russia and my cousin Kim Bunsun’s family are the only relatives in the world that we can reach.

여러분에게는 생소하고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일인지 모릅니다.

Maybe you are not interested about this part of your family history.

하지만, 멀리 타국만리 타향에 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찾은 지금,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두가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However, I would like to talk about a couple things since I found a very close relative living far away in a distant country.

먼저, 우리가 어떻게 이 아름답고 축복된 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First, I’d like us to think about how we exist and live in this blessed and pretty country of America.

간단히, 우리가 이곳에 태어나고 이곳에 살게 된것는 1970년대 초 처음으로 재선, 재문이와 대니, 요한이 엄마가 ‘American Dream’을 안고 간호원으로 이곳에 온 것으로 부터 시작 됩니다.

Simply, Jason and Jay’s mom and Danny and John’s mom came this country with an ‘American Dream’ as  nurses in the early 1970’s.

하지 만 그 배경에는 그들의 부모 즉 여러분의 할머니할아버지의 강한 소망이 작용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You also have to remember that in the context of that immigration, your grandparent’s strong desire was effected.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직 친척형제들을 찾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는 이 멀고 먼 낮선 타향에 온것입니다.

When our parents came to this strange country, they didn’t know any English – not even the alphabet — but they came to this country to get U.S. citizenship in order to find any of their family and relatives even across 5000 miles of ocean.

나도 사실은, 여러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한적이 별로 없지만, 할머니 , 할아버지의 꿈을 찾아 나의 직업과 한국의 배경들을 다 포기 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The truth is, though I haven’t told many people, I also came to this place and gave up my career and the environment of Korea to follow my parents’ dream.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낮선 땅으로 이민을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Even though my parents were Christians, it was not easy to settle down in this foreign country.

하지만, 그들에게 그들의 형제자매를 찾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내게 했고 커다란 꿈을 꾸게 했습니다.

But their belief and desire to meet their family and relatives made them strong enough to dream big dreams.

특히 할머니는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도전 했고 또 도전하는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My mother was an especially strong person. She always took on challenges others didn’t find easy and lived a life of challenge.

그들의 형제 친척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으며 대한민국의 정부로 부터 높은 훈장들도 받았습니다.

My mother’s family and relatives fought for their motherland with their lives and were honored by the Korean Government.

그러나 슬프게도 그 목숨바쳐 싸운 할머니의 오빠, 이모부들의 생사는 알길 없었고 연락할 길도 막막했습니다.

But, sadly they were by separated by the Japanese Empire and the Cold War. We don’t even know if they survived or not.

비록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돌아 가셨지만 그렇게도 그들이 보고 싶어하고 만나보고 싶어한 친척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Now, although my parents have passed away, we found my real cousin in Seoul, Korea and my mother’s real cousin in Havrobsk, Russia.

바로 할머니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할머니의 둘째 오빠 의 장녀(나의 진짜? 사촌) 의 가족이 탈북하여 남한 서울에 살고 있으며,

My mother’s second oldest brother’s oldest daughter lives in Seoul after they came out of North Korea,

할머니의 이모 딸(할머니의 사촌)이 러시아 하브롭스크에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And my mother’s younger cousin lives in Habrovsk, Russia with her 2 daughters’ families.

그리고 할머니가 그렇게 찾고 싶어 하던 대한민국 독립공로 훈장의 주인공이신 할머니의 이모부(전홍섭의사)와  첫째 오빠(김새협의사)와 그의 아들(당시 대학생) 1936년경 스탈린 대학살 시절에 행방불명 된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And Aunt Abroro told me that Jeon Hong-Seop, Kim Sae-hyup who my mother’s oldest brother, and Kim Sae-hyup’s son went missing during Stalin’s large massacre around 1936.

이번에 찾게 된 나의 사촌과 6촌에게나 또한 우리에게 친척이 매우 귀합니다.

My cousin and second cousin are very, very special to us, because we don’t have any other relatives.

돌아간 연미의 오빠 병건이가 나에게는 첫 친척?이었습니다. 국민학교 2-3년 시절에 얻은 첫 친척이었습니다.

Benny who passed away recently was not only my first nephew but also my first relative when I was in 2nd grade.

얼마나 내가 그를 좋아 했는지는 모든 나의 형제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My brother and sisters know how much I loved him.

어린 나에게는 가장 귀한 보물이었고 나는 그런 베이비를 얻기 위해 결혼하겠다고 그 어린 나이에 공언하고는 했습니다.

He was my most valuable treasure and when I was 8 or 9 years old, I told everyone I was going to get married to get a baby just like him.

내가 살던 인천에서 나의 첫 친척 병건이가 사는 서울의 가장 끝이였던 천호동은 멀고도 먼 길이였지만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매주 병건이를 보러 가려고 떼를 쓰곤 했었습니다.

It is very far from my village (Jemulpo, Incheon) to Chunhodong, Seoul (where baby Benny lived) but I bothered my mother with requests to visit Benny every week.

한번은 눈보라가 치는 아주 추운 겨울 주말에 나의 첫 친척 병건이를 보러 가려고 서울인천간 열차에 무임 승차를 했습니다.

One day, I still remember, on a Saturday in very cold and stormy snow storm, I got on a train to go to Seoul without a ticket.

사실 아주 어린 나이여서 당시에는 보호자와 같이 가는 경우에 무임승차는 당연한 것 이었습니다.

At that time, all kids were free when with their guardians.

그러나 문제는 조그마한 국민학교 2학년 꼬마가 열차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한 차장은 나를 서울 인천의 중간 역인 소사(현재 부천역)에서 내리게 하고 역전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But the problem was that a little boy was wandering the train alone.

So the train director left me at Buchon station, which was near the middle of the route between Seoul and Incheon.

당시 조그마한 기차역에 대기실이 있었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아니하지만 시골 기차역 정거장의 육중한 문이 닫히는 것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At that time, I can’t remember if there was a waiting room in the station or not, but I remember clearly the heavy door sliding closed with a heavy sound and a last glimpse of the director’s face with his uniform’s cap.

아마도 그는 돌아 오는 기차에 다시 돌려 보내겠다고 말한것 같다.

He probably told me he would send me back home on the returning train.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

But I couldn’t remember what he said and just cried.

어리고 당황한 국민학교 2학년 꼬마는 울면서 큰길을 무작정 걸어 갔습니다.

The poor little 2nd grade boy was so embarrassed, so he just left the station and walked out to the big street.

다행히도 나는 큰길을 따라 가면 그 길은 기찻길과 평행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Fortunately, I knew the national highway ran parallel to the railroad.

어느 평온해야 할 토요일 어린 꼬마는 울며 울며 물어 물어 그가 살던 제물포역을 찾아 눈보라 속을 걸어갔고 집으로 돌아오게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아니하였습니다.

On this Saturday, which should have been calm and peaceful, the little boy walked and walked in a snow storm and cold towards Jemulpo train station with endless tears, but he didn’t tell what happened to anyone.

이런 일들 속에서도 병건이는 여전히 나의 첫번째 친척이었습니다.

Despite all that happened, Benny was still my first relative.

….

….

병건이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It was probably also the same with Benny.

사람이 그리웠던 병건이와 우리의 이별은 전쟁과도 같은 것 이었습니다.

We miss people, so parting was like war to us.

병건이를 보고 돌아 가는 때 이면( 맹세코 병건이를 보러 갈때는 내 용돈을 다 털어 과자 한봉지라도 사 갖고 갔음. 아무도 이렇게 선물을 사다 준 사람이 없음) 병건이가 헤어지려고 하질 아니 하여서 언제나 순박꼭질을 했습니다.

When I came back home after visiting Baby Benny (I swear I almost always brought something to him when I visited him. Sometimes, I took my toys and I made something by myself for him. Once I made a wooden M16 rifle for him – the Vietnam War was happening at the time), we had to play hide and seek because he didn’t want to part with me.

순박꼭질을 좋아한 병건이는 언제나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병건이가 술래가 될때는 살며시 대문 밖으로 사라져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The poor little baby never refused to play because he loved that game. During hide and seek, I had to disappear beyond the gate.

대문을 나설 쯤이면 상황을 파악한 어린 병건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Always, always… when I closed the gate behind me I could hear baby Benny’s screaming and crying.

친척들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들 입니다.

Perhaps someone who has many relatives will never understand these things.

이번에 한국에서 찾은 나의 사촌도 손녀가 왜 우리는 친척이 없는가 하고 운적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Now, I heard that my cousin’s grandkids had cried for relatives.

영실이가 한국에서 방문했을때 영실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Also, I hear they cried when Ruth visited them in Seoul.

아마 영실이도 그런 아픔을 알고 있는 아이여서 그런 이야기들을 같이 나누었던것 같습니다.

Perhaps, Ruth also understands that kind of situation, so they may have talked about that kind of topic, I guess…

러시아의 나의 6촌도 나에게 Brat(형제) 인가 물었습니다. 그들 역시 친척하나 없이 그 곳에서 태어났지만 낮설게만 느껴지는 타향아닌 타향살이를 했을 것 입니다.

My new second cousin in Russia also asked me if I am her brother (Brat in Russian??). They are also strangers in a country far, far from their motherland and without any relatives, although they were born there…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이리라 생각 됩니다. 여기서 태어 나고 자라고 고향이지만 이방인으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I think you also agree with what I’m saying.

You maybe still live as a stranger in this country although this country is your motherland.

나는 여러분에게 당신은 한국인이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조상의 피가 흐르고 또 그 분들은 그들의 조국을 위해 피를 바친 훌륭한 분들입니다.

I don’t want to tell you that you are Korean. But in your blood, there is your ancestors’ blood.

And they amazingly sacrificed themselves for their motherland and for us.

또 이제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피를 같이 나눈 친척들을 찾았습니다.

Now, finally, we found our own blood – the blood we are so proud of.

서로 생각하는 것이나 문화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낮설게 대하지 말고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 할 것입니다.

Maybe we have totally different thoughts and cultures, but we need to try to understand each other.

서로에게 나쁜 점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겁내하지 말고 서로 만나고 소통하기를 소원합니다.

Maybe we can’t accept each other, but I want to tell you to be brave and see and talk with each other!!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 합니다.

I believe this is the method of Jesus, in whom we believe.

겁내지 말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녕을 빌어주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Please, don’t be afraid of saying hello and sharing a greeting with each other.

주후 2015년 4월 9일 대벽삼촌.

April 9, 2015, A.D. Uncle David.

김광택박사 3

1933년 원산성경학습원. 왼쪽 3번째가 김광택박사 모친, 그 다음이 우리 오마니 김혜경 시집가기전 17세, 가운데 김광택박사 뒤가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여사,

당시 이미 결혼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이순도여사는 이화여전출신의 엘리트.

김박사 옆이 동생 김광훈박사인데 사실 김광훈 박사가 형보다 먼전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 원산성경학원은 사실 한국 첫 침례교 선교사 Malcolm C. Fenwick(1889) 부인이 세운 여성들만을 위한 성경클래스였는데,
최근 한국 최고 대전침례신학대학은 그 시작을 이 성경학원으로 채택햇다???

최근 이종훈 목사님의 이성녀안나 여성도의 인터뷰에 이 성경학습원이 여성찬양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간증이 나온다.

이것은 이 성경학습원이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뒷바침한다.

1953년도 제 8회 총회, 장소는 1947년도에 구입 건축예배를 드린 점촌교회 당시 최고의 건물???
가운데 한기춘, 안대벽, 나요한선교사, 이모부 최성업? 제목사님들이 앉았고 안대벽목사 뒤 부인 이순도여사 왼쪽 옆 세번째 얼굴은 빠꼼히 수줍게 내밀고 계시는 오마니 김혜경 그 오른쪽 뒤 김광택박사…
같은줄 오른쪽 6번째 남용순,  그 뒷줄 얼굴크게 나온 김갑수목사님들이 보인다.
아버님은 어디 계시나.. 또 누가 계신가???

1957년도 미남침례교 첫선교사 나요한(1896.1.3.-1973.3.17) 한문으로는 나약한으로 되어있다.
John Abernathy 선교사 회갑기념(희년기념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의 희년은 안식년 7X7=49 즉 50년을 의미한다. 해서 50년도에 내한한 나선교사의 7년 안식년을 기념한것인지, 중국선교사였던 것의 50년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지만 1896년 생인 나선교사의 60희갑년을 기념하는 것이 맞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크라운맥주가 빛나는 대명관례당이다 ㅎㅎ
나선교사 사모님 왼쪽에 안대벽목사 이순도여사 부부, 오른쪽에 서울침례교회 필동 강성주목사님부부 사모님뒤가 오마니 김혜경전도사, 그 뒤 왼쪽 할머니가 청송의 병건이 할마시, 그 왼쪽 두번째 미남이 김광택박사. 

1957년 정도에는 이미 나선교사와 사이가 않좋았을 것같은 안대벽목사가 약간 몸을 반대쪽으로 틀고 잇고 뒷줄 가운데 어떤이는 팔짱을 끼고 잇고 그 오른쪽 양반은 약간 민망한 표정이 재미있다…ㅋ

나요한선교사가 한국부임직후 625동란 발발로 바로 철수 했다가 51년도에 다시 바로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오마니의 의형제 였던 미래의 사돈 청송 할머니의 장남이 당신 한국스레이트 김사장에게 부탁하여 영도의 김사장 사택에 머물게 된다. 미군의관들에 의해 시작된 부산침례병원의 태동도 이와 관련이 있을수 있다.

가운데 앉으신 모친, 그 뒤 검은 안경을 쓴이가 동생 김광훈박사, 뒷줄 왼쪽 끝이 워싱톤침례신학대학장(현 University of Verginia)을 지내신 신석택목사,
그 제일앞줄 검은 옷이 신석태목사 부인. 우리 어릴적 60년대 말 서울침신이 인천 숭의동 성애원에 잠시 와있을당시 교수로 와 있었고 부인은 가수였던기억이 난다.
사진 당시는 워싱톤 락빌 지역에 치공소를 크게한 김용구집사처럼 치공을 했었는데 우리가 미국에 온 80년대 초에 일본 동경에 선교사로 나가 오래 있다가 돌아와서 김호식박사가 세운 워싱톤침례신학대학에 학장을 지냈다.

1974년 여름이라고 직접 김광택박사가 기록하신 친필.
‘어머님과 광훈이(김박사 동생, 같은 메릴랜드 주립대교수로 민족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셨지만 1980년대 중반쯤 일찍돌아 가셨다. 백인과 결혼햇고 후손은 두지 못햇다) 중심으로 와싱톤에사는 한국에서 오신 침례교인들이 어머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러가지고 와서 야외예배를 본후 기렴 찰영. 1974년 여름.

왼쪽 나요한 선교사, 김광택박사가 아마도 이모부 안대벽목사와 같이 통역역활을 했을것인데,

가운데 분은 우리가 아는 선교사는 아닌 것으로 보아서 중국선교사 엿던 나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한데 결정적역활을 하고 같이 왓던 동경본부의 아세아 담당 디렉터 고든박사일 가능서이 크다.
그렇다면 나선교사가 파견전 방문햇을때의 사진일 가능성도 있다.

침례교의 영원한 젊은이 김광택박사… 영원히 젊은이로 있을 것 같았던…
호적상 나이가 1920년생 2018년 소천당시 만 98세인데..
김박사 어머니와 처녀때 친구엿던 오마니가 1915년 생으로 5살 차이는 말이 안돼고..
아마도 전쟁으로 호적이 없었으므로 나이를 수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전침신대학의 첫시작으로 기록된 원산성경학원에서 1933년도 사진에 7살? 내 기억이 맞다면 1926년생으로
2018년 소천할때 92세였을것이다.
 
사진은 부산민예사 마크가 선명한데… 그렇다면 서울 수복전 1950년대 초, 1926년생으로 치면 그래도 20대 후반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산 피산시절에는 저런 건물이 있을 데가 없으니 서울 수복후 어디 궁전에서…
오마니가 계시고 오른쪽 둘이 따로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좀 납작해 보이지만 머리과 세련된 복장이 김박사일수 밖에없다??
가운데 듬직한 학셍은 인천숭의동 산성침례교회 이천수목사??

아마도 김박사 도미유학 기념혹은 그 직전 서울 필동 침례교회 세번째줄 김박사가 보이고 그 왼쪽 이모 이순도 여사 그 왼쪽뒤 오마니 김혜경. 우리 아버님 김은섭께서  뒷줄 오른쪽 끝.

앞줄 왼쪽 끝 김용해, 오른쪽 2번째 담임 강성주, 끝이 이모부이자 설립자 안대벽목사.
1946년 남하한 우리부모님은 안대벽목사와 8명이 첫예배를 드렸다.

1964년 김용해 목사가 쓴 침례교사.
펜위익 선교사는 1929년 유서를 쓰고 영국 대사 까지 불러 공증을 마쳐 놓고 1935년도에 소천 했다.

당시 2 사람에게 돈을 남겼는데
양자로 있던 전치규 목사 에게 천원,
그리고 ‘할아버지 의 아희’ 김박사 에게 거금 500원을 남겼다.

얼마나 김 박사를 사랑 했는지 알수 있다.
김박사의 할아버지는 아마도 원산 본부의 사찰 집사 같은 분 이었을것이다.

그뿐만 호상 6인 중에 한 사람으로 기록에 올라 있다.

김광택박사 1

부산에서 찍은것으로 보아 1950년대 초.

Obituary of Dr. Timothy Kwang Tiek Kim

Dr. Timothy Kim of Chapel Hill died on January 16, 2018 at UNC Hospitals. 

He is survived by his wife, Kathryn Kim, daughter, Grace Kim and son, Eugene Kim. 

A funeral service will be held on Saturday, January 27, 2018 at 1:00 pm at Mt. Carmel Baptist Church, 2016 Mt. Carmel Church Road, Chapel Hill officiated by Rev. Barrett Freeman.  Burial will follow the funeral service at the Sparrow’s Family Cemetery.  

2008년 9/26 미부 중앙일보..

볼티모어 소재 모건주립대학(Morgan State University) 김광택 교수가 25일 40년 근속상(Forty Years Service Award)을 받았다.김교수는 이날 40년 근속상을 받은 7명의 교직원 중 유일한 교수다.

미국 대학의 한인교수들이 근속상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40년 근속상은 좀처럼 흔치 않아 눈길을 끈다.

김 교수는 현재 모건대학에서 사회학과 동양사·세계사를 강의하고 있지만 원래 전공은 음악였다.

1959년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대학 유학생(기독교음악전공)으로 처음 미국땅을 밟았다.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과 종교음악으로 학위를 받았고, 그 후 University of Maryland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고 50년간 민간외교를 하며 미국사회에 한국을 알렸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던 김 교수는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에서 오르간 주자와 성가대 지휘자로 꾸준히 활동해 왔다. 지금은 볼티모어시 콜게이트 침례교회에서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아내 캐드린김 여사도 미국 교계에선 이름난 성악가로 꼽힌다. 이날 시상식에서 남편의 반주에 맞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을 불러 박수를 받았다. 이들 부부는 지금도 팀을 이뤄 커뮤니티를 돌며 정기적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김 교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대학 강단을 통한 후학 양성과 기독교 음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경희대 영문과 55년졸업.  

1974년 모친 가운데 동생 김광훈 박사. 뒤좌끝 워싱턴침례신학학장 신석태

오마니 김혜경과 인천산성교회 이천수목사로 생각되는 고등학생이 있는것으로 보아 아직 한국동란 직후 부산피난시절…

김광택박사는 옆모습이 조금 납작해 보이지만 특유의 머리스타일과 양복차림이 확실할것 같다.

왼쪽 미남침례교 첫선교사 나요한 John Abernaty 와 김박사
아마도 김박사 미국 유학 출발직전 서울필동침례교회 오른쪽 제일 뒤 부친 김은섭, 정가운데 무섭게 생긴 큰이모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 왼쪽 뒤 우리 오마니 김혜경, 앞왼쪽 끝 김용해목사, 오른쪽 2번째 담임목사 강성주, 끝 안대벽목사.

바리톤 배종철 성가 2집.

쟈켓상태; MINT
**음반상태; MINT
**올갠; 김광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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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나 행한것 죄뿐이니
3.자비하신 예수여
4.주여 지난밤 내꿈에 뵈었으니
5.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
6.오 하늘 아버지

1.고요한 바다로
2.주님을 항상 욕뵈며
3.주여 나의 병든 몸을
4.주의 곁에 있으면
5.올마다 몰약내 풍기는
6.어제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배종철 성곡집

SIDE 1

1. 아름다운 장미
2. 가나안복지귀한성
3. 부름 받은 몸
4. 어서 돌아오오
5. 주예수 보다더 귀한것은 없네
6. 신자되기 원합니다

SIDE 2

1. 하늘가는 밝은길이
2. 내모든 시험 무거운짐을
3. 자비로운 주 하나님
4. 주안에 있는 나에게
5. 이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6. 아름답고 화려한곳

올갠 : 김광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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