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이웃 북마크들 200406

뉴저지

– hoon 살아가기, 살아내기

– 미국 이민

– 사랑 과 용서

– 교육, 삶,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

– 無我之境의 세상만사

– 생로병사 生老病死

friend

– 이주찬

– 이광명 Simon

– 양귀비

– 너구리

– Venezuela 이야기

– 땅끝 희망 줄넘기

– 달빛과 함께하는 세상

– 울산과 태화강. 그리고 영남알프스

– 엑스칼리버

– Daum 카페 한러극동학술교류학회 – 블라디보스톡 – 한인 3세 대학총장을 만남

– Daum 카페 쉼터가있는 중년방 – 용감한 사랑~

– Daum 카페 김현곤의 대양항해요트

– 알라스카김

– kczoon

– 날아라

– 목마른사람들을 시원케 해주는 오아시스

– 오랜 친구들 (OB)

교회

– 가정교회 휴스턴서울교회

– Christian Reviw 호주

– 배성수성지사랑

– 나라

– I Surrender All

– 관광마니아

– 헤세드를 입다.

– 풀뿌리 공동체

– 두레마을

– 고추잠자리

– bless

– 아침이슬

– 누리세상

– 김성만목사의 포트랜드갈보리장로교회

– 중독증 회복 치유 – 이시대의 마지막사역

– 신학천국

– 지구촌장로교회공동체(gpcc)

통일조국과 북간도

– 광우농장 -박남표, 고려인돕

– 고려인돕기

– 조조

– 피마자

– 대구맵시 없는 지구는 없다 -봉우리 최추봉

– ★ 행복한사람 ★ – 봉우리 최추봉

– 최운산장군

– 希伯來人

– 15만원 탈취사건 최봉설장군 수기

– 반민족처단

– 염옥남 변호사

– 100만참전전우서명본부/전우와민족 겨찾기명

–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 선대들의 업적을 찾아서

– 본향의 사랑

– 동북아 뉴스-재미 조선족

– 제자의 길

– 이주노동자이야기

– 규암 김약연과 명동촌

– 북한- 동아 주성하

– 함북노회

– 연변 – 연길

– ╰☆_고요속의 웨침..oо○

– 기쁨누리네 마을입니다.

– 重傳/이희빈 블로그

– 이북5도위원회

– 이북5도위원회

– 메릴랜드 이산-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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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mony&peace

– 하늘과 땅 사이에…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 불암산장

ART

– 박호의그림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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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순 옥

– 서양화가 김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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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미 풍경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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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정인성의 그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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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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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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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순이는 예쁘다>

– 다연多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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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숙 시인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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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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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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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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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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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미 선 교 문 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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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호목사 멤피스 커비우즈 koreankwbc.org

– 성락교회-성바협

– 한국침례교 역사 연구

– 밀양손씨

– 물길손길 기독교역사

– 김충기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 전북?우리교단

– http://pastorkeithnewlife.blogspot.com/

– http://newlifehillsboro.com

– http://pastoralbertnewlife.blogspot.com

– 부산침례병원 월레스선교사 추모-나요한선교사

– 부산침례병원(월레스 선교사 기념병원) 월레스(Effie Ruth Burns)가

– 한국 첫 남침례교 선교사 나요한(John Abernathy) 모교회

문학

– 이주홍문학관

– 탁이세상

– 발근달

– 나나의 잊혀진 전설

기계

– 운반기계 전문 제작 업체 원진 트랜스

– 자유 공 간

– 꾸물꾸물 전자공학

– 깜부의 기계 이야기 ♬♬

설교

– 정이철 -바른믿음, 고경

– 즐겨찾기명

다음 블로그의 이웃들도 많았는데….ㅠㅠ

침례교 원로 이창송 목사 소천 200429

침례교 원로 이창송 목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2020-04-29

침례교 원로 이창송 목사가 향년 97세를 일기로 4월 29일(수) 오전 6시 뉴욕장로병원/퀸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뉴욕안디옥침례교회를 개척한 고 이창송 목사는 손순옥 사모와 2남3녀를 두었으며, 2남이 이선주 안수집사와 고 이선일 목사이다.

고 이창송 목사 약력

고 이창송 목사는 1923년 7월 22일 중국 간도성 연길현 유서촌 관도구에서 부, 이보균, 모, 전마르다의 일남일녀로 출생하였고 1942년 고 손순옥 사모와 1942년 12월 18일 결혼하여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자녀 손이 모두 10명이다.

고 이창송 목사는 부친이 농업에 종사했는데 젊어서 부친의 일을 도우며 모태로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믿음의 큰 은혜를 받고 당시 해방과 더불어 공산 소련군이 중국을 점령하고 신앙인들을 핍박함으로 고향 친척을 떠나 믿음으로 살기위해 삼팔선을 넘어 1948년 8월 서울에 도착했다.

고 이창송 목사는 중앙신학교를 1951년에 졸업하고 1952년 전북 익산군 용안면 용안침례교회 전도사로 부임후, 1954년 영서지방 원주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춘천 옥산포교회, 궁촌교회, 칠산침례교회, 장마루교회에서 사역했고, 1977년 성남중앙침례교회를 개척하여 10년간 목회 후 1987년 11월 도미했다. 1988년 5월 뉴욕안디옥침례교회를 개척하여 10년간 목회후 은퇴하여 협동목사로 섬기다 2020년 4월 2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가족

장남: 이선주 자부: 이정애

손: 은진, 손사위: 이이삭

손: 다윗

차남: 이선일(사망) 자부: 이윤정

손: 진주, 은주

장녀: 이혜숙 사위: Josh Thompson

손: David 손자부: Alison

손: Joseph 손자부: Helen

손: John Paul 손자부: Corrie

손: Mary Anne 손사위: Jonathan Clark

중손: Lucy, Cate, Joshua, Frankie, Molly, Edith, Temple, Mabel, Lillie, Edie

차녀: 이혜영 사위: 김태한

손: 김상일 손자부: 이보영

손: 상국 손자부: 하민지

삼녀: 이혜경 사위: 김종완


장례일정

(가족과 순서자만 참가 가능)

환송예배

5월 4일(월) 오후 3시

162-14 Sanford Ave. Flushing, NY 11358

(중앙장의사)

하관예배

5월 5일(화) 오전 9시

Pinelawn Memorial Park

2030 Wellwood Ave Farmingdale, NY 11735

박경배 목사소천 200405

한국기독교침례회 31대 총회장을 지내시고 서울제일교회에서 목회하시다 도미하여 나성대한침례교회에서 목회하셨던 박경배 목사님께서 2020년 4월 5일 오후 6시45분에 하나님의 부르심 받아 소천하였습니다. 

장례예배는 우한 바이르스로 인해 가족장으로 간단하게 드리며 발인예배는 4월 11일 오후 4시로 남가주에서 드립니다.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산 안창호와 여동생 안신호 권사 200512

도산 안창호와 여동생 안신호 권사
년도별/퍼온글

2020-05-12 15:54:13

깜짝 놀랄 놀자이다.

60평생 읽은 어떤 역사서 보다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국가라는 남조선에서 쓰여진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에서도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사이비들에게 얻어맞아 죽은 지식인의 양심과 언론 때문에

역사는 객관성을 잃었다.

북조선에서는 더욱 심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로니 하게도 어떤 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적어도 이 한 사건에 관해서는…

이승만무리에게 빨갱이로 몰려서 미국에서 추방된 도산…

그는 다른 선택이 있었을 테데도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돌아와 잔악무도한 일경에 체포 되어 옥사했다.

신실한 민족의 선생 안창호…

그 부인은 태평양을 몇차례나 건너면서 옥바라지를 햇고 여자의 몸으로 많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궁민들은 자신들의 선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신실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옆에 끼고 다녔다는 도산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는 결국 공산혁명에 가담해야했다.???

  1. 안창호의 시국대강연

1927년 2월 길림의 교포사회는 전례없는 환영일색으로 들끓었다. 상해림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독립운동의 원로 안창호선생이 베이징을 거쳐 길림에 도착하였던것이다.

길림의 교포들은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 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우리도 《거국가》를 부르며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여 《나 간다고 설워 말아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거국가》는 《한일합병》후 청년학생들속에서 특별히 애창되였다.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거국가》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대통령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은 크게 과장된것이 아니였다. 림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독립군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안창호개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의 선배》라고 하면서 떠받들었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있는 이등박문이 한때 그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본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안창호의 호)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평안남도 강서땅이 지금은 천리마의 발원지로,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낳은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있지만 왜정시대에는 도산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자들을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안창호가 강서태생이였기때문에 서선지방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자기네 동향인이라고 자랑하였다.

안창호는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먹히운것은 민족의 자질이 낮은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총회, 흥사단과 같은 독립운동단체들도 조직하고 점진학교, 대성학교, 태극서관과 같은 교육문화기관들도 설립하였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 계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독립운동의 원로들속에 남강 리승훈이라는 이름난 교육자가 있다. 리승훈이라고 하면 누구나 오산학교부터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오산학교는 그가 설립한 학교이고 그의 개인자금에 의해 운영된 이름난 사립학교였다.

리승훈은 후대교육에 바친 공적으로 하여 륭희황제의 접견까지 받은 인물이다. 400년동안 서선지방의 평민들중에서 황제를 알현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는데 리승훈이 그 전례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왕을 만나보았으니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것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이처럼 고명하고 인망높은 사람으로 알려졌던 리승훈도 한때는 돈벌이를 해볼 야심을 품고 장돌뱅이가 되여 유기장사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50만원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평양에 왔다가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이 독립구국의 기초로 된다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는 거기에 감탄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운동을 시작하였다. 애국애족의 일념에 넘치는 안창호의 웅변술이 대무역상의 인생관에 새로운 돛을 달아준것이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안창호의 영향력과 감화력을 증시해주는 하나의 실례로 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국의 신문들은 안창호의 길림도착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청년학생들은 그가 머무르고있는 삼풍려관에 찾아가서 길림의 교포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해줄것을 간청하였다. 독립운동자들도 그의 숙소에 연줄연줄 나타나 강연에 출연해달라고 초청하였다.

안창호는 그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였다.

독립운동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아무 날 어디에서 안창호의 시국대강연을 한다는 소문을 돌리고 상부가, 차루가, 통천가, 하남가, 북대가, 우마항가를 비롯한 시내 여러 거리들에 광고도 큼직큼직하게 써붙이였다.

그 광고를 본 길림의 교포들은 모두 들뜨고 흥분되여 서로 만나기만 하면 《도산선생이 오셨다지요?》 하는 말로 인사를 나누기까지 하였다.

강연 전날 밤에는 나도 오동진과 함께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이역의 하늘밑에서 장장 17년만에 대성학교시절의 은사를 만난 송암 오동진의 감회는 참으로 류다르고 절절한것이였다. 오동진은 대성학교 사범과에 입학할 때 안창호가 인물심사를 어떻게 하였고 입학후에는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주었는가에 대하여 추억하였다. 나중에는 도산선생이 지은 청년학도가까지 부르며 그가 후대들의 독립정신을 계발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회고하였다. 그는 특히 안창호의 웅변술을 두고 실감있는 회억을 많이 하였다.

안창호의 웅변술에 대해서는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여러번 말씀하였다. 나는 만경대에 있을 때 벌써 아버지의 말씀을 통하여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웅변으로부터 시작되였고 웅변을 떠나서는 그의 명성도 론할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안창호가 연설을 하면 려염집아낙네들까지도 그 류창한 웅변술과 리상향론에 교화되여 가락지와 비녀를 뽑아 헌금을 한다는데 그게 과연 사실일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연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가? 안창호와 같은 큰 인물이 미주나 상해가 아니라 여기 길림에 노상 와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나라가 독립된 다음 나에게 대통령을 선거할 권리를 준다면 나는 그 첫번째로 안창호선생을 추대할것이다.》

이것은 그날 밤 오동진이 나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안창호의 시국대강연에 대한 나의 기대와 호기심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안창호는 조양문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의사 라석주의 추도회를 열고 겸하여 강연도 하였다.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모여온 3부의 대표들과 시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 유지들, 청년학생들은 거의다 강연회장에 모이였다. 바닥자리는 다 차고 모자라 대부분의 청중은 바람벽앞에 서서 강연을 듣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 안창호는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소문처럼 연설을 잘하였다. 그의 류창한 언변은 처음부터 군중의 찬탄을 자아냈다. 안창호가 동서고금의 력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섞어가며 조선민족의 출로에 대한 주장을 력설할 때 장내에서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연방 터져올랐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제였다.

안창호는 강연에서 《민족인격완성론》과 리상향론을 풀어나갔다. 그의 《민족인격완성론》은 《자아인격혁신론》과 《민족경제확립운동론》의 두가지 내용으로 되여있었다.

《자아인격혁신론》이란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들의 식민지가 된것은 인격과 수양이 낮은데 원인이 있는것만큼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 화목해지도록 각자가 자기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것이다.

안창호의 주장에는 어딘가 《자아완성론》에서 표현된 똘스또이의 사고방식이나 자기자신을 개조하고 단련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를 얻을수 없다고 본 간디의 견해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대경제공황의 징조가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던 때였다. 극도로 파쑈화된 제국주의가 대두하여 인간의 자주성을 총칼과 올가미로 참혹하게 교살하고있었다.

소부르죠아지식인들은 철갑으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위력앞에서 전률하였다. 이런 시대적분위기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정신적도피처가 바로 무저항주의였다. 무저항주의는 혁명적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공세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찾아가는 마지막안식처였다. 반혁명에 맞설 힘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결국은 무저항을 부르짖게 되는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저항주의가 개량주의로 표현되였다. 민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3.1인민봉기후 적극적인 항쟁의 방법으로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청산하려는 혁명적인 립장으로부터 리탈하여 교육진흥운동과 민족산업진흥운동을 민족운동의 최대의 기치로 삼고 우리 인민의 정신적자질과 경제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민족운동의 중심지도층을 이루고있던 근대지식인들은 토산품애용과 민족기업의 육성으로 민족을 경제적파멸로부터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 살림은 내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제적인 자급자족의 길을 타개하기 위한 범국민적인 물산장려운동을 벌리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조만식은 토산애용의 상징으로 한평생 무명으로 지은 조선바지저고리와 조선식두루마기를 입고 지냈다. 그는 명함장도 국산한지로 만든것을 사용하였으며 신발도 외국것을 신지 않고 조선것을 신고 다니였다.

민족개량주의를 류포시키는데서 리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론문을 읽으면 개량주의의 본질을 알수 있고 그 위험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쉽사리 판단할수 있다.

내가 《민족개조론》을 읽고 제일 불쾌하게 생각한것은 리광수가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처럼 여기고있는 점이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후진국이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이라고 여긴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선민족은 세계최초의 철갑선과 금속활자를 창조한 문명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며 동방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문화의 개척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외적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건한 자위정신은 일찌기 아세아만방에 맹위를 떨치였고 백지장처럼 깨끗한 우리 인민의 도덕은 세계의 찬탄을 자아냈다.

우리 인민의 인습이나 풍속가운데는 물론 부족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고 부차적인것이지 본질적인것은 아니였다. 그 부차적인것을 가지고 민족성이라고 할수는 없었다.

리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마치 조선사람들이 《렬악한 민족성》때문에 망한것처럼 말하였는데 조선이 망한것은 락후한 민족성때문이 아니라 통치배들의 부패무능때문이였다.

조선민족이 《렬등》하다고 개탄하는 리광수의 론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론조와 일맥상통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우리 민족을 《렬등한 민족》이라고 비방하였다. 《렬등》하기때문에 일본이 《보호》, 《지도》, 《통제》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민족개조론》은 일본제국주의강점자들에게 보내는 리광수의 공개전향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향문을 쓴 대가로 그는 지난날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총독부코앞에서 뻐젓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련애소설들을 써내고있었다.

소설가로서의 리광수는 초기에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대중이 그를 사랑한것은 그가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진보적인 작품을 써왔기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불리울만큼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많이 써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으로 하여 리광수에 대한 대중의 애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작품들에서 엿보이던 개량주의적요소가 완전한 자기의 형체를 가지고 이 론문에 등장한것이다.

민족운동을 개량주의의 방향으로 유도한 근대지식인들은 심지어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모은 돈으로 조선사람이 주관하는 민립대학까지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독립인재양성의 온상으로 될수 있는 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비폭력적인 물산장려운동도 역시 일제의 저항에 부딪치였다. 조선사람이 일본이 내려먹이는 상품을 쓰지 않고 국산제만 사용하는데 대하여 총독부가 눈을 감아줄리는 만무한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을 일화배척의 목적을 가진 반일운동으로 보고 독을 품고 방해하였다.

실력양성의 간판밑에 진행된 개량주의운동은 리념상에서는 애국애족을 표방하였으나 방법상에서는 비폭력을 전제로 하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운동이였다. 총독부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육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침략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지향은 사실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자기를 매장할 민족산업의 발달을 용허하지 않으리라는것은 초보의 초보에 속하는 상식인데 기업을 창설하고 국산품을 애용하면 민족의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개량주의길로 타락한 민족운동자들은 제국주의속성을 옳게 보지 못하였거나 외면하였다. 그들이 무력항쟁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평화적인 문화운동으로 이행한것은 투쟁방법상에서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식민주의자들과의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운동이였다.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속에서는 어차피 변질현상이 생기기마련이다. 실지로 개량주의자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후날 민족운동대렬에서 도피하든가, 전향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였다.

자강론의 변형인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준비론이라고도 함)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의거하고있던 리론적지탱점이였다.

그는 조선민족을 세계에서 정신적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이 적어도 미국이나 영국사람들만큼 때벗이를 해야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을것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강연장의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의 군중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있는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의 강연내용은 일구일언이 다 애국의 정신으로 관통되여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발언에서 민중의 투쟁의욕을 거세할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실망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점들이 있었다.

각자가 자기를 수양하고 인격을 높이며 그에 토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에는 나도 동감이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을 세계적으로 정신적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그의 견해와 실력양성을 위한 개량주의적방법론에는 도저히 찬성할수 없었다. 실력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투쟁을 추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되여야지 그자체가 혁명전체를 대신할수는 없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독립투쟁을 실력양성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실력이 양성된다고 하여 독립투쟁이 저절로 진척되는것은 아닌데 그는 민족의 력량을 어떻게 조직하고 그것을 종국적인 승리의 길로 어떻게 동원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민족해방투쟁의 기본형태로 되여야 할 폭력투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의 기초로 될수 있는 산업을 진흥시킨다는것도 역시 문제가 있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발전소를 건설하라고 차관을 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온 강토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는데 설사 렬강들이 차관을 준다 하여도 이국땅에서 어떻게 발전소를 세우고 벼농사를 착실하게 할수 있겠는가. 또 일제가 조선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만 내버려두겠는가.

나는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였다.

-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놈들에게 통채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 우리 민족을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러한가?

- 연사가 말하는 렬강이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인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는가? 또 우리가 그들의 《원조》에 의해서 독립을 가져올수 있는가?

질문쪽지는 앞에 앉은 학생들과 사회자를 거쳐 안창호에게 전달되였다. 반발심에 못이겨 단호하게 서면질문을 들이대기는 하였으나 막상 사회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앉아있는쪽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사실 그때의 내 심정은 복잡하였다. 그 질문때문에 강연중에 있는 연사가 불쾌한 자극을 받게 된다면 안창호를 숭배하고있는 독립운동자들과 수백명의 청중들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되지 않을가 하는 우려도 생기였다. 안창호의 강연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그의 강연을 위해 남다른 성의를 보인 오동진도 서면질문의 장본인인 나를 고깝게 생각할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결과는 내가 바라는것이 아니였다. 내가 안창호에게 서면질문을 들이댄것은 그가 우리의 질문을 받고 잠간만이라도 자기의 주장을 검토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정신에 배치되는 유해로운 사상을 그 이상 더 먹이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대선배로 존경받는 안창호에게서 그가 청중에게 채 말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침이나 방략을 듣고싶은 욕망을 억누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사태는 내가 예상한것보다 크게 번지였다. 안창호는 쪽지의 글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나서 사회자에게 무엇인가 몇마디 물었다. 후날 손정도에게서 말을 들으니 그날 안창호는 사회자에게 질문쪽지에 김성주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아는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그만 김이 빠져버리였다. 안창호는 조금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연탁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연사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받아들인것 같았다. 좀 자극이나 받으라고 그런 질문을 했는데 안창호자신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강연을 중도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린것이였다.

실망한 청중은 도산선생이 왜 갑자기 저렇게 주접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출입문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길림독군서에서 수백명의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가지고 강연회장에 불시에 달려들어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체포했던것이다. 연사인 안창호는 물론, 현묵관, 김리대, 리관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이 한꺼번에 무리로 붙잡혀 경찰청에 구금되였다.

이 대검거사건을 조종한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구니도모였다. 안창호의 길림도착과 때를 같이하여 봉천에 나타난 구니도모는 중국헌병사령관 양우정에게 수백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길림에 모였으니 이를 체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양우정의 명령에 따라 길림독군서의 경찰들과 헌병들은 구니도모의 조종밑에 조선사람들의 가택을 수색하는 한편 대동공창에 달려들어 류례없는 대검거작전을 벌리였다.

우리는 안창호가 비록 강연은 잘하지 못했지만 적들이 그도 포함하여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을 붙들어간데 대해서는 치솟는 격분을 누를수 없었다. 더구나 서면질문끝에 강연이 중단되고 강연이 중단되는 동시에 안창호가 체포되여가니 나로서는 이런 련쇄반응의 책임이 마치 서면질문에라도 있는듯 한 느낌까지 들어 괴로운 생각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중국 동북지방을 통치하고있던 장작림군벌은 《미쯔야협정》으로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있었다. 이 협정은 만주지방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의 근원을 없애기 위한 악질적인 협정이였다.

이 협정에 의하여 조선인애국자들을 체포하는 졸개들에게는 상금까지 주었다. 중국의 일부 반동관헌들은 상금을 타먹으려고 허위밀고까지 하였다.

대동공창에서 벌어진 집단적인 검거소동도 역시 장작림군벌이 일제의 사촉을 받아서 감행한 반동적인 폭압행위였다.

우리는 즉시에 《ㅌ.ㄷ》성원들의 회의를 열고 붙잡힌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그 걸음으로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도 체포된 사람들을 빼내올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넋을 잃고 앉아있을뿐 속수무책이였다.

우리는 모두 단결하여 길림독군서에 압력을 가하면 안창호선생은 물론, 체포된 사람들을 다 빼내올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군중의 힘을 동원하는것이 제일 위력하다는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독립운동자들은 맨주먹밖에 없는 자네네가 무슨 재간으로 그 무지막지한 독군서놈들을 굴복시키겠는가, 군중이 나서서 떠드는것보다는 돈이나 뢰물이 더 맥을 추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대중의 힘을 잘 믿지 않는 타성이 그때에도 나타났다.

나는 돈으로 통하지 않는것도 군중의 단결된 힘으로 능히 해결할수 있다고 그들을 꾸준하게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손정도가 운영하는 길림례배당에서 시내의 독립운동자들과 조선인유지들, 청소년학생들이 참가한 군중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집회참가자들에게 독군서가 왜놈들과 한짝이 되여 조선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동포들을 무리로 붙잡아갔다는것을 설명한 다음 그들이 이제 몇푼의 돈을 받아먹는 대가로 체포해간 사람들을 일본경찰에 모조리 넘겨줄수 있다는것을 경고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왜놈들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무자비한 처형을 면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한 일인데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사람들은 한마음한뜻으로 단결하여 애국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중적석방운동에 떨쳐나서자고 호소도 하였다.

우리가 안창호에 대한 석방운동을 벌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지어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는 청년학생들속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안창호의 리론에 대하여 서면질문까지 들이댄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그를 구원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쓰느냐는것이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안창호의 사상을 문제시하는것이지 안창호란 인간자체를 반대하는것은 아니다, 안창호도 조선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애국지사인데 어떻게 그를 구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고 설복하였다. 나는 그때 수난당한 조선민족은 어려운 때를 당하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에 내세웠다.

내가 안창호의 강연을 반박한것은 그들이 사대주의적이고 민족허무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인 립장에서 벗어나 조국을 광복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해주기를 바랐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민족주의자들과 사상투쟁을 한것은 그들을 타도하자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반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안창호석방을 위한 군중집회가 있은 다음 길림의 담벽과 전주대들에는 《중국경찰이 근거없이 조선동포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놓고 박해한다.》, 《중국관헌은 일제의 간계에 속지 말라!》, 《감옥에 갇힌 조선동포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라!》는 내용의 삐라와 격문들이 나붙었다.

우리는 중국의 각 신문사들에도 글을 써보내여 사회여론을 환기시켰다. 길림시내의 청소년들과 군중들은 매일과 같이 독군서에 몰려가 감금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웨쳤다. 어떤 날에는 독군서앞에서 시위도 벌리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중국의 반동군벌이 체포해간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일제의 손에 넘겨주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독군서는 군중의 압력에 못이겨 20여일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구속자전원을 석방하였다. 긴장된 투쟁끝에 얻어진 안창호의 석방은 나를 몹시 기쁘게 하였다.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온 안창호를 만나려고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갔다. 나는 그가 질문에 담겨진 우리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리해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감옥에서 나오자 바람으로 총총히 길림땅을 떠나가버렸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상해에 돌아갔는지 똑똑히 알수 없지만 나는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운 기분으로 길림을 떠났을것이라고 확신한다. 애국자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시련을 감당해낸 그후의 그의 생활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안창호가 길림을 떠난 후 나는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10여년이 지난 후 우리가 백두산쪽에서 무장투쟁을 할 때 안창호는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최후를 마쳤다.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평생을 민족의 계몽과 단합에 바쳐온 안창호가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찌기 떠나간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별스럽게 맺어졌던 안창호와의 인연이 그것으로 완전히 끊어져버린것은 아니였다. 안창호는 갔지만 그의 녀동생 안신호가 해방후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였다.

해방후 조국에 개선한 나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통하여 안창호의 누이동생이 남포방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 당시 남포지구에서는 김경석동무가 파견원으로 활동하고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안신호를 찾을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며칠후 남포에서 안신호를 찾았다는 통보가 올라왔다. 김경석동무에게 전화로 그 녀자의 경향이 어떤가고 물으니 그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다니는 녀자인데 독실한 신자 같다고만 대답하였다.

나는 안신호가 이름난 애국렬사의 동생이기때문에 종교를 믿어도 애국심만은 있을것이니 당적영향을 주면서 잘 이끌어보라고 김경석동무에게 말하였다.

김경석동무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시답지 않아 하였다. 신자들이라면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때여서 우리가 그렇게 루루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경원시하는 페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있었다.

몇달후 김경석동무는 나에게 안신호가 입당하였다는것과 그가 성경책속에 당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새 조선건설에 헌신분투하고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안창호의 애국혼은 결코 지하에만 있는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안신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독립인사로서의 안창호의 파란많은 일생을 생각했고 생전에 그가 민족을 위해 바친 로고를 더듬어보며 감개무량해지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는 남북련석회의때 북반부에 들어와 안신호를 만나보고 놀랐다. 공산주의자들이 상해림시정부 거물의 누이동생을 중앙녀맹부위원장으로 등용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안신호는 그의 젊은 시절의 애인이며 약혼녀였다.

안신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곧 안창호에 대한 믿음이였다. 그것은 또한 리념이나 신앙을 초월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속에서 애국애족의 뉴대에 의해 혈연적으로 련결되여있는 독립운동의 모든 선배들에 대한 우리의 례절이며 인사이기도 하였다.

2019년 남침례교 28만명 감소

남 침례교 28만명 감소
년도별/퍼온글

2020-06-10 09:46:29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교단(SBC)의 교인 수가 역사적으로 가장 큰 하락을 겪고 있다고 크리스천포스트가 7일 보도했다.

남침례교단 산하의 출판부서가 작성한 ‘연간 교회 개요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8만 7655명의 교인을 잃었으며 이는 교단의 2%에 해당하는 수치다. 현재 교인은 1452만 5579명이다. 라이프웨이이 기독교 리서치에 따르면 이 통계는 남침례교단이 한해(one year)기준으로는 약 100년 만에 겪은 가장 큰 하락세다.

2018년 한 해 동안 교회는 74개가 증가해 4만 7530개이지만 교인의 수가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세례 수도 4% 하락해 2018년에 24만 6442건에서 2019년에 23만 5748건으로 줄었다.

남침례교의 교구 수는 51,138개로 감소했으나 여러 장소를 포함하는 교구(multisite congregations)의 수는 505개로 성장했다.

교인 수 감소와 더불어 남침례교단에 가입하는 추세도 위축됐다. 교단의 헌금액 또한 1.44% 감소한 116억 달러로 보고됐다.

라이프웨이 리서치의 스콧 멕코넬 이사는 침례의 감소는 증가하고 있는 ‘미국의 세속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성명에서 그는 “이런 숫자들이 지난 한 해에 많은 개인과 교회들이 쏟은 모든 복음주의적 노력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다”며 “그러나 평균적으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와서 세례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멕코넬 이사는 연간 통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대면 접촉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 및 업데이트된 자료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밝혔다.

퓨 리서치 센터의 한 연구에서는 미국인의 65%만이 현재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반면에, 무신론자,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자, 다른 종교를 가진 인구는 26%로 증가했다.

이는 10년 전의 미국인 크리스천 수와 비교했을 때 12% 감소했으며 특히 젊은층에서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공공종교연구소가 ‘미국인들이 종교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연구에서는 미국 성인의 비율에서 ‘종교와 무관한 계층의 증가’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탈’을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이 연구는 오늘날의 미국 젊은이들은 종교적 정체성 없이 자라날 가능성이 노인층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한국 침례교 인물사 목차 – 김갑수 200618

한국 침례교 인물사 목차 – 김갑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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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8 08:57:01

목차

12 동방예의지국에 매료된 캐나다 선교사|펜윅(Malcom C. Fenwick)
36 침례회 빛을 밝힌 백암골 사자 제2대 감목 |이종덕 목사
48 이 땅에 섬김의 본을 남긴 침례교의 개척자 |장기영 감로
56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몸소 실천한 침례교회의 기둥 |박노기 목사
64 풍랑속에 순교의 꽃을 피운 |김희서 교사
72 생명의 면류관을 밝힌 감옥 순교자 |전치규 목사
84 순교자의 형제로 핍박 속에 열매맺은 신앙의 꽃 |김영관 목사
94 꿋꿋이 침례신앙을 지킨 의지의 항해사 |이종근 목사
104 따뜻한 남쪽나라 복음의 선구자 |장석천 목사
110 이 땅에 순교의 나무를 심은 올곧은 신앙의 선배 |김재형 목사
118 침례 교단의 부흥 강사 |한봉관 목사
126 복음의 푯대를 바라고 달려간 |백남조 목사
134 침례교회의 할렐루야 할머니 |강요한나 전도사
142 울진에 순교의 빛을 남긴 동해의 예언자 |전병무 목사
150 만주의 눈보라 속 복음의 씨를 뿌린 |노재천 목사
158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박기양 목사
168 충청지역 전도대의 기수 |이덕여 목사
178 한국의 페스탈로치 |한기춘 목사
186 침례교 중흥을 이뤄 낸 |존 애버내티 선교사
196 울릉도 복음의 선구자 |김석규 목사
202 역경을 딛고 대륙에 복음의 불길을 일으킨 복음의 사도 |최성업 목사
212 숭실대 전도단의 기수, 학원선교의 선구자 |차광석 목사
218 교단 대표 32인과 함께 감옥 속에서도 복음의 빛을 밝힌 |김용해 목사
228 경주문화교육재단을 설립하고 교육의 횃불을 든 목회자 |허 담 목사
234 아름다운 교회 건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 |김주언 안수집사
236 푯대를 향해 오직 한길을 걸은 |신성균 목사
246 이상적인 교회를 꿈꾼 혁신적인 목회자 |장일수 목사
252 전국감사독립가를 작사한 독립운동가의 후예 |문규석 목사
260 서울침례교회를 개척한 |안대벽 목사
266 침례신학대학교 제3대 학장 |지대명 선교사
272 성직자 양성의 사명자 |이원균 목사
278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 섬긴 |이덕상 목사
284 3대째 선교사의 전통을 이어온 |이대복 선교사
290 「한국 침례교의 산 증인들」을 쓴 순교자의 아들 |김장배 목사
294 12세 최연소/i> 전도자 |신혁균 목사
302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한 |왕은신 선교사
308 한손엔 복음 한손엔 사랑을 |최희준 선교사

펌) 창조과학으로 사이비와 하나된 교단의 민낯 200618



창조과학으로 하나된 교단의 민낯…

자유토론판

2020-06-18 09:49:59


<주> 창조과학을 주장하기 위해 보여지는 과학과 학문 폄하과 거짓논리등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우리 교계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같은데… 퍼 왔습니다.

뭔 사이비들 처럼 믿는다고 하면서 무작정 우기지 말라고 하는것 같은데…

일단,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고 하나님외의 어떤 것도 우선이 되서는 아니되고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10계명에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무작정 주장하는 분들은 과연 내가 알고 주장을 하는 것인지 그냥 믿는다고 해서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인지 재고를 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주 작은 사기를 남발해서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다시 한번 회개하는 마음으로 옳은 주장을 해야 할것이며 정확하게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 입니다.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는 자들을 죄있다 하시지 않을 것 입니다.

끝으로 네이버에서 퍼 왔는데 로그인를 못하기 때문에 허가 없이 퍼 왔습니다. 혹 필자가 보시면 성함 석자 남겨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참고로 세계 최대 우리 교단은 미국 남침례교 Southern Babtist Convention, SBC 입니다.

해 보통 서양사람들에게 침례교다 함은 진짜 , 조선 개구 보수가 아닌, 보수 남침례교를 일컷는 말입니다.

글에서 나오는 침례교는 우리 일반적인 남침례교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많은 사이비들이 침례, 침례회등을 도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불행한 한가지는 마귀사탄의 노력은 당신들을 잔인하게? 토막살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진리와 불의를 교묘하게 섞어서 믿는 자들을 미혹케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벌갱이들은 몽둥이로 때려죽이자고 하는 개독들과 진실하다는 성도??들이 미혹케하는 ‘좋은글?’에는 환장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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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달에 스토클 교수 논문 가지고 국민일보에서 설레발치면서 “진화론 뒤집는 연구 결과 발표”라고 떠들던 기사 밑에 보니까 천지일보 기사가 또 예쁘게 붙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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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sinhj2003&categoryNo=12&logCode=0

<펌글>

물론 내용은 별 차이 없습니다. “현생종이 20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지구상의 생명체가 20만 년 전부터 급격하게 나타났다는 학술적 논문이다~!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설이 맞는다는 연구다!”

하지만 진실은 “그딴 거 없다”였죠.

https://blog.naver.com/sinhj2003/221294185426

[공유] 기레기의 기사에 대한 저자분의 답변

제가 100%의 확신을 갖고 예언합니다. 창조설자들이든 창조과학회든 이런 저자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네들…

blog.naver.com

국민일보는 여의도순복음 교회 돈으로 만들어진 곳이고 천지일보는 신천지에서 세운 곳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랑 신천지랑 왜 이렇게 친하냐고요? 원래는 서로 물어뜯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교회들입니다.

그냥 “우리는 나쁜 진화론 공격하는 좋은 기독교 집단”이라고 선전질하기 좋으니까 비슷한 생각하는 놈들끼리 똑같은 소리 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위와 비슷한 교회들로 또 뭐가 있을까요?

진화론 공격하는 현대 창조과학의 원류는 제7일 안식교입니다.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라는 제7일 안식교 사람인데 현대 창조과학의 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홍수지질학(지구상의 모든 지형지물이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에 의해 나타났다는 주장)을 책으로 내서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가 1960년대였고 이 사람이 주로 활동하던 몇 년간은 거의 혼자 다 해 먹으셨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후에 이게 돈벌이가 된다고 판단을 한 다른 개신교 교파들도 모여서 홍수 지질학 뿐만 아니라 생물학, 천체물리학 등에도 손을 대고 1970년대에 미국 창조과학회가 설립됩니다.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2072

세계 창조과학의 중심지 [한국창조과학회]

창조과학자 HOME > 자료실 > 창조과학자 세계 창조과학의 중심지 이재만 한국창조과학회 미주지부 창조과학선교회 회장 미국창조과학 연구소(ICR,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에 대하여 물어 보시는 분들이 많기에 지면을 이용하여 알려주고자 한다. 단지 ICR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창조과학이라는 분야가 자리잡는 과정을 이해하는 의미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1859년 다아윈의 ‘종의 기원’ 이래로 과학자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진화론적 사고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http://www.creation.or.kr

여기서 미국 창조과학회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이 어디서 시작했는지가 나오는데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Christian Heritage College)라고요.

https://heritagecollege.vic.edu.au/about/college-history/

College History – Heritage College

About Us Principal’s Welcome Message College History New Heritage College Multi-Purpose Centre Values Key Staff Contacts Testimonials Our History Founded in 1999 in Narre Warren South, Heritage College is part of Adventist Schools Victoria, a system of schools that has been delivering quality

heritagecollege.vic.edu.au

보시면 아시다시피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제7일 안식교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창조과학 자료들의 원류는 제7일 안식교에서 나온 것들이 맞습니다.

창조과학 동영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들 중에도 어렵지 않게 제7일 안식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동영상

나는 진화론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Walter Veith

http://www.youtube.com

이 분 명언

생물학에 대해 일반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하시겠다면 일단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Walter_Veith

After joining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he rejected the theory of evolution in favor of creationism[2][3] and so had to give up teaching at the University of Cape Town.

어쨌든 미국 창조과학회는 제7일 안식교에서 출발했고 현재도 위와 같은 인물들을 볼 수 있죠.

한국창조과학회에서는 “우리는 그들의 연구적 성과를 지지할 뿐이지 그들 교단의 교리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팀킬을 했었죠.

그럼 교리는 따르지 않고 내용은 다 가져오시는 한국창조과학회는 어떨까요?

http://www.kacr.or.kr/

한국창조과학회

진화가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가? : 곤충 그림의 날개를 갖… 최근 보고된, 날개에 그림이 있는 작은 파리는 과학자들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게 정말 사실이야?”… 진화론-창조론 논쟁이 중요한 이유 : 토양, 나무, 그리고 … CMI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창조과학 단체들은 창세기의 기록이 복음을 이해하는 기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간단히 말… 호박 내로 생물이 포획되는 과정이 밝혀졌다. : 나무에서 … 곤충(심지어 곤충 소화관의 식별 가능한 미생물까지),

http://www.kacr.or.kr

사이트 밑에 보면 주요 후원 교회가 나오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대한 예수교장로회(예장) 쪽입니다.

중간에 있는 온누리 교회가 예장 통합 쪽 대표의 대형 교회입니다.

예장이 통합하고 합동 쪽으로 나눠지는데요.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365

합동 쪽에서도 창조과학회에 따로 후원을 내고 있습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1293755

합동쪽 총회장이 2009년도에 아예 헌법재판소에 교과서에서 진화론 가르치지 말라고 헌법소원을 냈었어요.

제7일 안식교에서 만들어내는 근본주의 프로파간다를 퍼트리기 위해 대한 예수교장로회가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장 말고도 창조과학회에 후원하거나 일요 예배나 강연, 수련회 교육 프로그램에서 위와 같이 제7일 안식교의 미국 창조과학회에서 나온 자료를 번역해서 유통하는 개신교 교회들.. 셀 수 없이 많겠죠.

잘 알려진 거짓말 중 하나인 호프 부인 거짓말은 침례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건 창조과학회에서조차도 포기한 거짓말입니다.

◇다윈이 죽기 전에 회개하고 진화론을 포기했다

이 주제는 미국 침례교 저널인 워치만 엑사미너(Watchman Examiner·1915)에 기사화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저널은 다윈의 부인인 호프씨가 다윈이 죽은 뒤 “병상의 다윈이 기독교로 전향했다” “다윈이 반종교적 본질에 고통스러워했다”는 고백을 했다고 전했다. 그 후 이 기사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인용됐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다윈의 임종을 지켜봤던 가족들에 의해 모두 부인됐다. 호프씨의 이야기는 당시 상황과 전혀 맞지 않고 특히 근거가 없는 것으로 창조과학회는 보고 있다. 따라서 근거가 희박한 이런 주장을 목회자나 교사들이 설교나 강의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것 말고도 침례교에서 시작한 창조과학적인 거짓말들이 참 많습니다.

통일교라고 하면 개신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통일교 쪽에서도 아마 다른 개신교 교회들과 같은 교회로 취급받기 싫을 것 같고 다른 교회들도 딱히 통일교와 같은 그룹에 속하고 싶지 않을 것 같네요.

하지만 진화론 앞에서 이들은 한 그룹으로 묶입니다.

조나단 웰스는 교회에서 활용하는 창조과학 동영상에서 매우 자주 볼 수 있는 통일교 신자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Jonathan_Wells_(intelligent_design_advocate)

Wells joined the Unification Church in 1974

통일교 말고 여호와의 증인은 어떨까요?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질색을 하고 싫어할지 몰라도 그들은 통일교처럼 성경을 베이스로 하고 있으며 일단 본인들 스스로 가장 진실되게 기독교를 믿는 자들입니다.

근본주의적인 신앙생활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이들에게 창조과학은 너무나 좋아하는 떡밥이지요.

https://www.jw.org/ko/%EC%84%B1%EA%B2%BD-%EA%B0%80%EB%A5%B4%EC%B9%A8/%EA%B3%BC%ED%95%99/%EC%A7%84%ED%99%94%EC%99%80-%EC%B0%BD%EC%A1%B0/

진화와 창조 | JW.ORG

생명은 창조되었습니까, 진화되었습니까? 성경 내용과 최근의 과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을 검토해 보면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http://www.jw.org

보시면 한국창조과학회나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가 하는 말을 정확히 똑같이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하면 또 이분들이 빠질 수 없죠.

비록 기독교를 매우 싫어하고 반대하는 분들이지만 같은 구약을 믿는 이슬람 근본주의 쪽이요.

마찬가지로 진화론을 매우 매우 싫어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냐면 진화론 가르치는 교사들 죽이고 현대 과학 가르치는 학교 불태울 정도로 증오합니다.

진화론과 지동설 부정하는 보코하람…교사 학살의 이유

[서울신문 나우뉴스]아프리카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은 지리 교사 등 교사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유는 간명하다. 자신들이 부정하는 …

news.naver.com

개신교 교회를 다니시는 많은 분들은 어떻게 저런 이슬람들과 자신들을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느냐 하실 겁니다.

그런데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하는 행태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냥 보코하람한테 총을 뺏으면 딱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어차피 학교에서 진화론 못 가르치게 하고 대신 창조설화 가르치고 싶다는 것은 똑같잖아요.

단지 보코하람은 총으로 사람들에게 강압을 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반대로 방법론적으로 개신교 근본주의와 유사한 곳이라고 본다면 라엘리안 무브먼트도 있죠.

https://blog.naver.com/nswinfi/221195827288

[라엘리안 보도자료]생명의 기원은 ‘진화론’ 아닌 ‘지적 설계’! 새창으로 읽기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18(AH72).1.29

blog.naver.com

여긴 그냥 대놓고 “지적설계”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요? 지적설계…

창조과학에서 만들어낸 지적설계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라엘리안의 사례는 창조과학이 어떤 신학적 문제를 갖는지 아주 잘 보여줍니다.

신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정의해서 다루려고 하니까 신이 아니라 다른 주체가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어지거든요.

제가 항상 강조했듯이 지적설계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정의된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게 과학적으로 맞다고 해도 신학적으로 엄청난 무리수가 되어 버려요. 3위일체에서 4위일체가 되어 버리니까요.

사실 이 문제는 라엘리안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진화학자들이나 창조과학 반대자들이 지적해온 문제입니다.

“과학 교과서에 개신교 창조설화도 넣자고? 그럼 개신교 신만 넣을 것이 아니라 힌두교, 그리스 신화, 노스 신화, 아후라마즈다 기타 등등 다 가져와야 할텐데?”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외계인이 추가된 것에 불과합니다.

창조설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믿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죠.

솔직히 전 상관없어요. 현대적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교리 믿고 싶으면 믿을 수 있죠.

그게 비록 과학적 방법론을 대충 흉내 낸 가짜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걸 창조과학회에서 주장하듯이 정통적인 복음주의 교리를 믿느라 창조과학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근본주의의 극에 빠져든 다른 기독교 계열 종교들 혹은 이슬람, 라엘리안과 매우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아셨으면 합니다.

순복음을 다니든 신천지를 다니든 예장을 다니든 침례교든 통일교든 어느 쪽이든 간에요.



침례교 역사 200627

침례교 역사
침례교역사- pic

2020-06-27 07:38:50

주) 뒤부분 유럽 침례교 역사는 익명이 쓴 글이랍니다.

서 론
제 1 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

  1. 펜윅 선교사의 내한
  2. 엘라 씽기념선교회
  3. 펜윅의 한국 순회전도단
  4. 선교사업의 본격화
    제 2 장 대한기독교회 (1906-1949)
  5. 대한기독교회시대 (1906-1920)
  6. 동아기독교회 시대 (1921-1932)
  7. 동아기독대 시대 (1933-1940)
  8. 동아기독교 시대 (1940-1949)
    제 3 장 대한 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68)
  9. 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51)
  10.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1952-1959)
  11. 총회 분열시대 (1959-1968)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말콤 C. 펜윅에 의하여 1889년 한국침례교회의 여명은 밝아 왔다.물론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셀러였는데 이들은 1885년 4월 5일에 인천항에 도착하여 장.감리교의 상주 선교활동은 시작되었다.당시 한국은 흥선의 쇄국정책으로 문명의 후진성은 모면치 못했고 민간의 신앙은 자연을 숭배하는 샤머니즘과 1500년간 내려온 불교와 이조의 건국이념인 유학 등이 삼교혼합이 되어 있었다.이런 가운데 개신교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고 그중 단독으로 입국한 말콤 C.펜윅(Malcolm C. Feniek,1863-1935)에 의해 1889년, 한국 침례교는 시작이 되었다.많은 시련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침례교회는 발전하였고 몇 차례의 시대적 변천을 겪은 후 오늘에 이르게 된다.

1> 한국침례교회의 시작시기 (1889-1905)
2> 대한 기독교회 시대 (1906-1949)
3> 대한 기독교침례회 시대 (1949-1968)

위 3시대를 거쳐온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를 본론에서는 요약하여 침례교회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서 침례교회의 역사와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자 한다.또한 선진들의 신앙여정을 따라 오늘의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 1 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 (1889-1905)
1889년 말엽 캐나다의 일개 독립선교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한 말콤 C.펜윅(Malcolm C.Fenwick,1863-1935)기원한다.

  1. 펜윅 선교사의 내한
    그는 1863년 캐나다의 펜윅가의 11번째 아들로 때어나 성품은 강직하고 고집이 있는 의지형이고 모험적인데 다만 융화적인 성품이 결여된 약점이 있었다.그는 평신도 전도자로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과 사도행전 1장8절에 강한 도전을 받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26세 약관의 나이로 한국에 도착한다.1894년에 한국순회전도단을 조직하였는데 초교파적이고 복음전도적이며 진취적인 선교단체였다.
  2. 엘라 씽기념선교회
    보스톤의 클라렌돈교회 담임목사로 부터 3년간 펜윅은 신학공부를 하고 그 교회 집사의 외동딸 엘라양의 죽음을 기념하는 엘라 씽기념선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런다. 이 선교회는 우선 폴링선교사부부와 가들라인 여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다. 그때 전도를 받고 최초로 침례 받은 사람은 홍봉춘,장교환,김치화,고내수, 최춘명등이다.재정난과 타교단의 박해로 1900년 선교회는 철수한다.
  3. 펜윅의 한국 순회전도단
    1896년 한국 순회전도단의 책임자로 함경도 원산에 근거지를 두고 펜윅의 선교사역은 시작이 된다. 원산의 작은 초가집에서 예배했는데 이때 신명균을 만나 전도한다. 신명균은 외모단정하고 과묵하며 의지력이 있고 청렴결백한 선비였고 그는 서양사람의 오,

육인의 몫을 할 정도로 역량 있는 사람이 했다.펜윅은 한국인처럼 살려고 노력하여 ‘서양양반’이라고 까지 했다.1893년 펜윅은 요한복음을 번역 ‘요한의 기록한 복음’이란 표제로 간행했고 ‘만민에게 좋은 기별이라’는 전도용 소책자도 발행한다.

  1. 선교사업의 본격화
    1901년 엘라 씽 선교회를 인수하고, 한국 순회선도단과 병합하여 12월 강경에서 두 교회를 모아 대사경회(大査經會)를 인도한다. 신명균은 선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었고 공주,강경,칠산,한산, 온양, 옥천,영동,고산등로 확산되었다.1905년 공주교회내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신명균을 원장으로 장석천,황태봉,고문중, 이종덕등으로 후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성경교육을 받게 되었다.신명균의 성공적인 결실은 펜윅으로 하여금 백인 우월주의적인 선교정책이 잘못됨을 인식하고 토착사역자들을 배출하는 중요성을 알게 하였다.

제 2 장 대한기독교회 (1906-1949)
대한기독교회는 한국 침례교회사에 최초의 총회조직이었다.1906년 10월6일 강경에서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46개의 교규를 만들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 대한기독교회시대 (1906-1920)

(1) 대화회 (大和會)

사도행전 2장의 신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고후5:19-21에 둔 ‘인류의 선결은 화목’이라 하여 대화회라고 했다.그리하여 회무도 화목의 잔치였고 교인의 친교에 역점을 두었다.첫 대화회는 1906년 10월에 강경교회에서 개최하여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회’로 칭하고 감목에 펜윅을,목사에 신명균을 세우고 46개조의 교규를 선포하고 만주시베리아,노영등으로 전도지를 확정하기로 결정했다. 대한기독교회의 행정구조는 권위주의적인 조직과 감독제도를 절충한 조직이었고 초교파적으로 신약 성서적인 특징은 있었지만 개교회의 독립성과 자치성,민주주의 적인 회중제도의 신약적인 사상은 전혀 없었다.구역도 설정하고 특히 신명균을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했고 한태영 외4인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하여 재만선교도 시작되었다.

(2) 구역설정과 전도확장
1907년 제2회 대화회가 공주에서 소집되었다. 원산에서는 성서학원을 개원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고 간도전도에 전념하였다.
제3회 대화회가 1908년 칠산에서 소집되었다.구역은 확장되었고 함경도,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제4회 대화회가 1909년 용안에서 소집되었다.경상도,전라,충청도에서도 전도활동이 활발하였다.
제5회 대화회가 1910년 강경에서 소집되었다.교세가 커져 4개월 사이에 35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때 울릉도에도 전도되었다.
제6회 대회회는 공주에서 소집,복음찬미를 25장까지 번역하였고,
제7회 대화회는 산점에서 소집,각처에서 자력 전도자가 속출하였고
제8회 대화회는 신리교회에서 소집되었고 제9회는 원산에서 1914년 소집되었다.초기의 전도활동은 박해와 멸시,게다 재정적 곤란도 있었지만 자급개척,순회전도방식으로 전도했다.

(3) 재만선교와 간도선교
경제적,정치적인 이유로 만주와 간도에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기독교는 가장 유력한 종교가 되었다.초기의 선교의 동기는 정신적,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것이었고,일제탄압으로 인한 재만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한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한계를 재만한인들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한가지 추가할 것은 장로교.감리교 양교파의 예양협정으로 국내선교의 기득권을 잃었던 원인도 있다.
간도는 한태영외 4인이 제1회 대화회의 결의대로 파송을 받아 전도하여 얼마 되지 않아 30여개소의 예배소가 생기게 되었다.

(4) 지도권을 둘러싼 교회파동
제 2대 감목으로 이종덕목사가 임명된 것에 대한 신명균과 손필환과 펜윅의 갈등이었다. 1915년 펜윅은 단독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지만 출간되지는 못했다.
제11회 대화회가 1916년 새원에서 소집, 일본의 포교계 제출에 대한 거부를 결정함으로 박해와 구금과 집회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제12회 대화회는 1917년 간도 종성동에서 소집하였다.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활동은 큰 업적있고 특히 삼인전도기(신성균,박기양,노재천)는 순교자적인 감동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이었고 러시아선교에 나선 4인(박노기,박희서,전영태,최응선)은 대한기독교회 사상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5) 신약성서의 출판(1919.10.18)
제14회 대화회가 1919년에 간도 종성에서 소집되었다. 1919년의 업적은 신약성서를 출판한 것이다. 1891년 요한복음전, 1893년에 약한의 기록한대로 복음이,1898년에는 요한복음.빌립보서합본이 원산역으로 나왔다.
제15회 대화회가 1920년에 영일 광천에서 소집되었다. ‘대한기독교회’란 이름으로 수난이 많으므로 교단명칭을 변경키로 가결하다.

  1. 동아기독교회 시대 (1921-1932)

(1) 교단명칭 변경
제16회 대화회가 1921년 경북 광천에서 소집하여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유는 대한이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인상이 안 좋다고 트집을 잡아 변경을 강요당했다.

(2) 교회의 수난
만주와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교역자들은 공산당과 일제로부터 독립투사라고 오인되어 수난을 당하였다.손상렬목사는 한국독립단의 밀정으로 몰려서 순교 당하였다.이때는 한국이 개화운동과 문명퇴치운동이 활발할 때 펜윅은 3대 교의라 해서 1>성경을 많이 볼 것 2>성령께 순복할 것 3> 마귀를 대적할 것을 강조하여 대대적인 독경운동(讀經)이 일어났고 만주에는 성경학원이 설치되었다.

(3) 제3대 감목
제17회 대회회는 1922년 함북 증산에서 소집되었고 제18회 대화회는 1923년 강경에서 소집되었고, 8월30일부터 15일동안 원산에서 대안회(待安會)를 펜윅의 60주년 기념예배로 드렸다. 1924년 제3대 감목으로 전치규목사가 임명되었고,제19회 대화회가 행곡에서 소집되었고 교역자는 70명,전도는160명이나 되었다.

(4) 순교와 전도열
1925년 펜윅은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전도길에 오르고 제21회 대화회는 1926년 점촌에서 소집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6인 전도가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펜윅은 1926년 동아기독교회에 교단적인 학교교육폐지령을 내렸었다.
제23회 대화회가 1928년 원산에서 제24회 대화회가 1929년에 역시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이 해는 전국적인 구호운동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에서 쫓겨온 한인들을 구호).제25회와 26회 대화회도 원산에서 소집되었다.1928년 김영진목사.김영국감로가 순교를 당하였다.자료상으로 최초의 순교자는 1925년 길림성지역으로 파송된 윤학영, 김이주,박문기,이창희이다.

  1. 동아기독대 시대 (1933-1940)
    1930년대는 침례교회의 쇠퇴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을 황민화하기 위한 황궁요배,신사참배를 강요당하고 가중되는 식민정치, 펜윅의 소천으로 지도력의 약화로 교세는 약화되었다.

(1) 동아기독대
제28회 대화회가 1933년 원산에서 소집되어 교단명칭을 동아기독대로 변경했는데 이유는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라는 명칭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별된 양 무리를 뜻하는 ‘隊’로 하였다.1933년 1월 펜윅의 부인 하인즈가 소천하였다.

(2) 재한교회의 수난
1934년 전치규감목을 대신하여 제4대 감목으로 김영관감목이 취임하였다. 제29회 대화회가 1934년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성경출판을 위한 장기계획을 세우고, 경비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였다. 1935년 일제는 한국민족의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결국 장로교와 감리교는 굴복하였지만 동아기독대와 성결교는 불복하여 혹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3) 펜윅의 소천
1935년 12월 향년 72세의 일기로 46년간의 한국선교를 마감하였다.
펜윅은 사도 바울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였고 , 그는 의지가 강하였고 강직하며 보수적인 성서관을 갖고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는 축호전도와 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또 제자훈련에 관심이 많았고 나라 사랑하는 옳바른 국가관을 강조하였다.

  • 그의 공적 * 1> 대한기독교회의 조직 2> 동북아의 선교활동 3> 토착선교의 귀감
    제34회 대화회가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이종덕안사를 임시의장으로 회무를 진행하였고 1940년 제5대 감목에 이종근목사가 선정되었다. 그가 제5대 감목으로 피선된 때부터가 교단의 책임자로 대임을 받고 가장 많은 박해 속에 어려움을 당한 시기였다.
  1. 동아기독교 시대 (1940-1949)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광분하여 내선일체정잭을 세우고 수탈과 한글사용금지, 창씨개명 등으로 일본과의 동화정책을 폈다.당시 한국전역에는 24개구역 100여 교회,만주에는 6개구역 100여 교회, 시베리아에는 2개구역 47개교회,몽고에 수개처의 개척교회가 있었다.이렇게 당시 한국 내에는 180교회가 기록상으로 있었는데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고,사경회나 원산 성경학원나 대화회를 통하였기에 신학적인 기초가 없다는 것이 동아기독교의 약점 중에 하나다.

(1) 교단명칭의 환원
제35회 대화회가 1940년 원산에서 개최되었고, 교단명칭을 ‘동아기독교’ 로 환원하였다.

(2) 재만교회의 분립
일제는 만주에 있는 모든 기독교를 통합하는 합동정책을 써서 장로,감리,성결,안식,조선기독교,동아기독교등 6개교파가 만주국 조선기독교연맹이 되었다.그리하여 한국내 여러 교회와 분립케 된 것이다.

(3) 교회의 수난
1940년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의 치밀한 계획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말살정책이 강화되었다. 교단해체를 위한 작업으로 교단교규 제출령으로 탄압이 노골화되었고 집회의 자유를 박탈하고 1941년에 열려야 할 대화회도 열수가 없었다.또한 우태호 사건으로 인해 우리 교단이 불순단체로 오도되어서 신약성서,복음찬미,원산총부의 모든 문서,서류를 압수 소각 당하였다. 우태호사건으로 인해 원산 사건이 발생하는데 동아기독교와 성결교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원인이 되어 32명의 교단 지도자들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1944년 전치규목사(3대 감목)가 옥중순교를 당하였다. 1944년 5월 교단해체령으로 예배및 집회가 금지되고,교회가 폐쇄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는데 이때가 동아기독교 사상 최대의 시련기였다.이는 교단 반세기를 뿌리째 뽑는 대학살이었다.

(4) 8.15 해방과 교단재건
해방되기까지 15개월 동안 교회의 암흑기가 지났지만 해체령으로 인해 재건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그리고 북한의 교회는 공산주의의 도래로 더욱 큰 고난이 왔고 조국의 분단과 함께 남북의 교회도 단절되었다.1946년 9월 노재천감목의 소집으로 제36회 대화회가 강경에서 개최되었는데 42개 교회만이 참석할 정도였다. 특기할 것은 대화회가 총회제로,감목제가 회중체제로,임원도 새 체제에 적합한 명칭으로 바뀐다. 1947년 37회 총회 때에 옛날의 대화회제도를 존속하자고 하는 일부 교회가 총회로부터 분리되었다.해방후 북한의 교회는 제 1,2회 총회를 거치다가 6.25동란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남한의 교회는 49년 성경학원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제 3 장 대한 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68)
해방후 40여교회에 350명의 교인으로 교단 재건을 시작하였고 1949년 미국남침례교회와의 연결이 정식으로 출현한 것이 첫 출발이다.

  1. 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51)

(1) 교단명칭 변겅
1949년 제39회 총회가 강경에서 개최되어 ‘대한기독교 침례회’로 변경하였고, 미남침례회 고딘선교사와 일본에서 도조선교사가 한국교회의 파악을 위해 내한했고,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와 연결이 되었고 이해 교단의 두 지도자(장석천목사의 소천,전병무목사의 순교)를 잃었다. 1950년 미국의 존 애버내티 선교사 부처가 방한 제40회 총회에서 미국선교부와 정식 제휴하게 되었다.

(2) 6.25동란
미국 남침례교회는 동란 동안 영적 사역은 차선책으로 보일 정도로 난민구호에 많은 힘을 썼고 한국교회와 더욱 결속되었다. 3개월간채 안되어서 동란이 발생하고 1.4후퇴후 부터 9.28수복까지 당시 이종덕총회장을 비롯하여 침례교인 61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3) 구호사업의 본격화
동란후 교세는 1946년보다 더욱 약화되었고, 제41회 총회가 원당에서 모여서 애버내티 선교사와 함께 미남침례교회의 구호사업이 시작되었다.이 총회에서는 이종덕목사와 61명의 순교당한 침례교인들을 위한 기념예배를 먼저 드렸고,미국교회와 제휴하기 위해 교회의 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또 한국침례교회도 세계침례교회에 가입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이사장 안대벽외 5인으로 문교부에 등록하여 합법적으로 승인 받았다.부산의 난민들을 대상으로 7인 구호위원회가 조직되어, 미남침례교회 원조금,의류,식량 등으로 활발히 전개되었고 레이선교사와 요큰의사,부라인의사가 방한하여 의료와 구호사업에 힘썼고 몇몇 미군목들도 큰 기여를 하였다.타교파의 교역자가(당시 침례교목사는 10인) 교단 내에 교역자의 부족과 선교비의 풍족함을 알고 교단 내에 영입되게 되는데 먼저는 교리적인 문제와 교권장악을 위한 파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침례교단은 혼합된 교리와 신조로 초교파한 집단으로 전락하는 위기감이 있었다.

  1.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1952-1959)
    제42회 총회가 칠산에서 노재천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어, 종래의 총회를’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로 하고 규약을 제정했다.미남침례회는 한국선교부를 조직하여 선교와 구제사업을 지속했다.
    제43회 총회가 점촌에서 안대벽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었다.53년에 침례교단의 인재양성을 위해 대전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나요한원장이 취임하고,시은고등학교와 성애원을 인천에 세웠고 당시의 교세는 목사19명 전도사57명,침례인1356명,교회87개 였다.
    제44회 총회가 대전에서 1954년에 신혁균목사의 사회로 회집되었고 대전 성경학원이 정식 문교부 인가 신학교로 승격하고, 부인전도회가 발족하고 침례출판사를 개설하였다.
    제45회 총회가 1955년 충무로에서 신혁균목사의 사회로 회집되었고 제1회 교단지’침례회보’가 창간되고 영도에 왈레스침례기념침례병원을 크게 확장하고 세계침례회 총회에 한국대표를 파송하였다. 안대벽을 중심한 주류파와 조응철을 중심한 전입신진파의 갈등이 심화된다.
    제46회 총회가 56년에 부산에서 장일수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다. 조응철목사를 퇴진시켰고 미선교부와 총화간의 사무절차가 수립되었다.그후 총회와 선교부와의 불화가 있어 한국식과 미국식의 정책적인 대립과 젊은 선교사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반발 등이다. 침례회신학교 특수과 졸업생 18명이 배출되다.
    제47회 총회는 1957년 충무로 교회에서 회집되었다. 미남침례회선교부는 총회장 안대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 선교사월락스의 실언으로 더욱 갈등이 심화되었다.전국 교역자 강습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침례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39명이 배출되다.
    제48회 총회가 점촌에서 안대벽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다.대전에서 173명이 모여 교역자부흥강습회를 실시하다.선교부 5개년 선교정책으로 ‘교인마다 십일조,교회마다 자립’라는 표어로 자립운동을 실시하였다.당시 교세는 전국 178개 교회 교역자 196명,16.000명 정도였다.
  2. 총회 분열시대 (1959-1968)
    한국 침례교 역사상 가장 불행스런 시기였다. 1959년 선교회측에서 안대벽총회장을 불신임한 것이 발단이 되어서 전통적인 주류세력과 선교회와 합세한 반대 세력란의 양대 진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국 대전총회가 대흥동교회에서, 포항총회가 포항교회에서 개최되었다.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신학교에서 교역자를 양성하고 진흥원을 설립하였고 다양한 선교를 실시했다. 반면 포항총회는 재정적인 난관으로 초교파선교단체로 선교하였지만 성애원도 폐쇄시킬 정도로 어려웠다. 교단의 분열의 원인은 이상적인 인물의 등장이요, 교단 중진들의 자숙의 부족으로 타교단 교역자들의 무분별한 전입이며 선교사들의 근시안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인한 것이었다.참으로 통탄한 일이다. 대전측은 ‘한국기독교침례회’포항측은’기독교한국침례회’로 확정지었다.(63년) 여기에서는 포항 측의 약사와 대전측 약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교단의 통합을 위한 합동운동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65년 침례회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이 전입파를 반대하고 선교부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주권을 회복 하여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선교부와 총회는 개교회 정책보다는 기관사업으로 전환되었다.이 때에는 특히 성령운동이 왕성히 시작되었다.결국 총회와 선교부에 의해 교단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은사와 기도원운동으로 회귀하면서 이 운동으로 인하여 교단의 통합을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결국 1968년 4월16일 한국침례교회사의 대교단을 통합되어 총회장 김용해목사가 선출되었다.
    그후 침례회신학교는 한국침례교신학대학으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고(73년), 76년에는 교단의 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하고 77년에는 옥천수양관을 착공하고 신학대학 제 4대 학장으로 정진황학장이 취임하였다. 1979년에는 침례대학보가 창간되었고 1980년에는 1천교회 확장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결 론

먼저 침례교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갖게 된 솔직한 감정은 이제부터 또 다시 새로운 침례교회사를 창조해야겠다는 다짐과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 속에 한국 개신교회사의 전체접목을 가질 필요를 느끼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약소 민족으로서의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던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목회사역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논문참고도서

역사편찬위원회편저.『한국침례교회사』.이정수집필,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1990년초판.

김갑수목사 저. 『한국침례교인물사』. 시와 시론사,1981년.

장로교도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Ⅰ세(King JamesⅠ: 1603-1625)가 영국으로 와서 왕이 되었을 때, 청교도들은 영국교회도 올바른 개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제임스Ⅰ세도 청교도들에게 국교를 신봉토록 강요하고 핍박하자 일부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미국 남침례교단은 단일교파로는 개신교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다.
지난 세기 세계적인 전도자로 명성을 날렸던 빌리 그레엄 목사나, 대통령 재직중도 교회학교 교사직을 고수했고 대통령 퇴임 후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지미 카터 전대통령도 침례교 집사다.
현재 전 세계 침례교인의 통계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회수가 15만 8천여개, 등록교인수는 대략 1억 5,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

16세기 영국 성공회 안에 있었던 청교도운동으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 생겼다. 이들 중 존 스미스(John Smith) 목사와 40여 명의 비국교도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1607년 후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1608년 또는 1609년 초에 스미스는 메노파(Menonnite)의 영향을 받아 재침례파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오직 신자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스미스 자신이 자기에게 침례를 주고, 40명의 회중들에게 관수례(affusion, 물을 들어붓는 방법으로 침례를 줌)를 주었다. 그러나 1610년 스미스는 ‘자기-침례’(se-baptism)에 회의를 품게 되고, 침례의 사도적 계승을 생각하다가, 1610년 2월경에 대다수 회중은 스미스와 함께 메노파에게 하나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결국 1612년 스미스는 회신을 기다리다가 사망했고, 함께 했던 다른 무리는 1615년에 메노파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는 스미스가 개인적으로 침례를 주었을 때 자진해서 그 의식을 인정하고, 자신의 침례의 효력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고 비난했다. 한편 헬위스와 소수의 무리는 1612년경에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근교에 있는 스피탈필드(Spitalfield)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역사적 증거가 있는 영국 땅의 최초의 침례교회였다. 이들은 신학에 있어서는 알미니안 혹은 일반침례교였으며, 침례양식은 관수례였다. 헬위스는 왕에 대한 강경한 언사로 말미암아 제임스Ⅰ세의 명령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1616년 이전에 사망했다.
이후 스피탈필드 교회의 지도권은 존 머튼(John Murton)이 이어받았다. 암스텔담의 메노파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서신을 보면, 지도자가 틀림없는 엘리아스 투키(Elias Tookey)를 포함한 16명이 1624년 5월 이전에 머튼의 회중으로부터 출교당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고, 안수받은 목회자를 갖기 위해 워터랜드 메노파와 통합을 모색했다. 이들은 메노파와 장기적인 편지 왕래는 있었으나, 통합요청은 거절되었다. 그 이유는 교리상의 차이보다도 영국 회중은 정부가 요구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서를 묵인해 주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머튼의 교회도 1626년경에 머튼이 죽은 후 역시 메노파와 통합을 요청했다. 그러나 1626년 11월 25일에 이들도 역시 거절당했는데, 그것은 성례전의 집행, 맹세 및 정부지지 등에 관한 그들의 견해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침례교인은 다섯 교회에 적어도 150명 이상으로 본다. 1630년에는 여섯 교회가 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암스테르담의 메노파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 그들과 친교를 맺고 런던의 회중을 하나의 단체로 인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통합을 모색한 가장 큰 동기는 목회자의 부족으로 인한 목회자 요청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노파는 영국 침례교와의 교우관계는 환영했으나, 통합은 여하한 형태도 거절했다.13) 1644년에 이르러 일반침례교는 찰스Ⅰ세(CharlesⅠ)의 치하에서 윌리암 로드(William Laud, 1573-1645) 대감독의 혹독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오직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삼고 종교적 자유에 헌신해 47개의 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1689년 합법적인 신교자유(信敎自由, Toleration)가 공포되는 것을 보게 된다.14)

16세기 북유럽의 재침례교도와 유기적인 혈족 관계이기보다는 영적인 혈족 관계가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초기 침례교인들은 성경의 권위와 신자들의 치몌에 관해 재침례교도들과 일치하는 반면, 정치적인 맹세와 공직 금지에 관한 철저한 포기에 대해서는 그들과 견해를 달리했다. 침례교인들은 1535년 뮨스턴 반란 사건(Muenster Rebellion)에서 있었던 처참한 살육과 같은 것을 낳았던 일부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현대 역사 연구 결과는 그러한 무장 봉기가 재침례교도의 주류와 이후의 멘노파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집증해 주고 있다.

16세기 영국 성공회 안에서 있었던 청교도 운동으로 분리주의자들이 생겼는데, 그들은 “타락한 국가 교회”로부터 신자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국가 교회와의 분리를 희망했다. 그들은 성공회 안에서 더 이상 어떤 지속적인 개혁도 원하지 않아서 언약에 의해 함께 한 신자들의 “모인 공동체”(gathered community)를 지향해 갔다. 프란시스 존슨(Francis Johnson)은 이 분리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1586년 캠브리지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학에서 성공회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존 스미스라는 젊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1600년에 존 스미스는 링콜린(Lincoln)의 설교가로 선출되었다. 1606년에 그는 고향인 게인스보로(Gainsbrough)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하나의 분리주의 교회가 성공회로부터 막 분리되려는 때였다. 스쿠르비 영지(Scrooby Manor)에 있던 한 무리가 마침내 미국에 도착하여 순례자 교회(Pilgrim Church)를 이루었다. 스미스와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는 유아 세례의 시행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직 신자들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스미스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침례를 주고 40명의 회중들에게 관수례를 주었다. 얼마 후 그는 이 자기-침례(self-baptism)를 의심하여 대다수 회중들과 함께 워터랜드 멘노파(Waterland Mennonites)에 입회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헬위스와 소수의 무리들은 1612년경에 영국으로 돌ㅇ와 런던 근교에 있는 스피탈필드(Spitalfield)에서 첫 번째 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해에 스미스가 죽은 이유로 해서, 헬위스와 무리가 실제로 이후 침례교의 시초가 되었다. 헬위스는 그의 저작과 설교로 인해서 투옥되었고, 1616년 죽었다. 그의 지도력은 존 머튼(John Murton)에 의해 이어졌고 곧 이어 47개의 일반침례교회가 생겨났다. 이 교회들은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를, 목적의 측면에서는 복음주의적이었고 심지어 챨스 1세 당시 추기경 라우드(Laud)의 손에 의해 혹독한 핍박의 대가를 치르고도 종교의 자유에 헌신한 교회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속량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만 해당한다는 칼빈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독립침례교회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1616년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이 이끄는 분리주의 회중이 런던 근교에 있는 사우스와크(Southwark)에서 결성되었다. 제이콥을 포함한 이 회중의 몇몇 지도자들은 1640년 이전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이때 종교의 자유를 위해 영국으로 도망했던 초기 이주민들을 신대륙에서 다시 만났다. 토벳(Torbet)은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을 모두 침례교인이라고 묘사했다. 17세기 영국 침레교인들은 참 교회를 만드는 것에 대해 확고했다. 그들은 교회를 정당한 절차에 의해 임명된 지도자가 있고, 복음을 전파하고 정기적으로 예식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 아래 함께 하기로 언약한, 구속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로 간주하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들의 침례는 개인적인 회심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1638년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침례교인들은 존 시필스버리(John Spilsbury)의 지도하에 최초의 독립침례교회를 세웠다. 1640년 그들은 더 낳은 침례의 모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리챠드 블런트(Richard Blunt)의 지도로 말미암아 그들은 신자들 또는 성인에게 시행되었든지 아니면 유아에게 시행되었든지 간에, 세례나 관수례에 의한 침례는 사도 시대부터 채택되어온 침례의 형태가 아니며, 참 침례는 ‘몸을 장사와 부활에 비기는 것으로 물 속으로 담그어서 시행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블런트는 네덜란드에 있는 린스버그(Rhynsburg)에서 침수 침례를 행하는 작은 멘노파 단체를 발견하였다. 블런트는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기 회중들에게 돌아갔다. 거기서 블런트는 “교사”인 블랙록(Mr. Blacklock)에게 침례를 주었고 자신도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함께 “침수 침례를 받기를 희망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침수 침례를 행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합류하여 숫자가 많이 증가하였다”. 침례교회들은 그들의 역설적인 주장으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오랫동안 당황스럽게 해 왔다. 즉, 자치적인 회중과 교단적인 응집력,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교리상의 신앙의 안정성, 상호 의존적인 면을 가지고 선교 노력의 연합을 발전시킨 새로운 교회들과 제도를 낳았던 독립성에 관한 주장들이 바로 그것이다. 초창기부터 그들은 일종의 연합의 필요를 느꼈다. 교회들 사이에 교제를 하게 만든 최초의 동기는 처음에는 방어하기 위한 의도였다. 침례교인들은 자유교회 체제를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교회적 연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사회 안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유아 세례의 거부는 이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판단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와 교회 둘 다의 통제밖에 있는 이단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는 아직 종교적인 자유와 자유로운 국가 안에 있는 자유 교회에 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침례교회들은 내적인 필요로 의해서 상호 격려와 인도를 위해 그리고 적대적인 세계에 대항해 자신들을 정의하기 위해서 연합하게 되었다. “교회들로부터 온 대표자들”(messengers from the churches)의 연차 모임에서, 그들은 교리 또는 신앙 교육의 문제와 관련하여 질문하곤 했다.1644년, 런던에서 7교회가 모인 한 모임은 정확한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한 그들의 최초 노력 중 하나로서 신앙고백을 만들어냈다. 그 내용의 변증적인 성격은 다음과 같은 1646년판 표지 제목에 나타나 있다; “진리에 대한 변증을 위한 출판, 그리고 무지에 대한 고소 : 강단과 출판물을 통해 자주 불공정하게 비난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벗어주기 위하여”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침례교인들의 수는 많이 증가하였고 영국과 웨일즈에 있는 백여 개교회들로부터 파견된 대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1677년 런던 신앙 고백도 영국에 있는 다른 비국교도들(Dissenters)이 선호할 만큼 충분히 수용되었다. 1648년에 만들어진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해 상당히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런던 신앙고백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을 포함하여, 이후에 만들어진 침례교 신앙 고백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최강 인천 숭의침례교회 주일학교-황일지선생님 1960년대말

최강 인천 숭의침례교회 주일학교-황일지선생님

인천숭의동20번지-성애원숭의침례pic

2020-08-04 18:05:36


68년인가???

김갑수목사님의 장남 용선이가 있는것 보면

서울 수도침례신학이 얼마간 내려와 있던 때이다.

고추자전도사님과 황중호선생님이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이때는 내 위의 아이들은 이미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장경순전도사와 이정님이와 정님이 옆이 만순이로 생각되었지만 만순이는 이보다 더 어렸을 것이다.

다 아는 아해들이지만 이름은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성명중목사가 용선이 앞에 훤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리게 생겼을것 같은데 이제보니 연설자처럼 훤한 얼굴에 빛이 난다. ㅎㅎ

좌측에 어깨동무한 꼬마중에 큰애가 어른 자전거를 몰고 다니던 콩나물집 막내인지 얼굴은 익은데 가물거린다.

그러고 보니 명중이 앞줄 왼쪽 한 아이가 경순이 동생일것 같다.

어째서 기억을 못하고 잇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순이에게는 쌍둥이 어린 남자 동생들이 잇었고 그 밑인지 위인지 여아가 하나 더 있었던것 같다.

생각을 못하다보니 경순이를 만났을 때도 그 동생에 대해 물어본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사진을 정말 50년 만에 보면서 저 아이는 경순이 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순이 위의 천사같던 언니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모자같은 것들을 왜 쓰고 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아마도 숭의국민학교는 원하는 사람들은 저런 일제순사같은 모자를 쓰도록햇던것 같다.

내 위로는 아무도 없던 시절이여서 인지 쑥스러워서 인지 누구 모자를 빌려 인상을 쓰며 장난을 치고 잇다 천박하게 ㅋㅋㅋㅋ

앞에 그래도 귀티나게 생긴 여아가 만주에서 오신 유집사님 딸이다…

이름이 2개 였는데… 얼마전 까지 기억을 하고 잇었는데.. 똑똑해서 어디 이대 영문과를 다녔다고 한것 같고

오빠 용빈 동생 정빈이는 찾을 수 없다. 

지금도 만나면 같이 뭔 아이들 놀이를 하면서 놀수 잇을것 같은 아이들…

특히 여아들은 산구번지에 오래 산아이들이어서 아직도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교회들도 아이들 구경하기가 힘든데 저정도로 주일하교 학생들이 많았다니 정말 대단하다.

황중호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고추자 전도사님 그리고 악바리 천사 로이스누이와 인천영화여중 절친 고효순 그리고 68년 신, 유, 함이라고 써놓았다.

함이라 하면 인숙이와 인선 자매를 말할것 같은데 동생 인선이는 4학년때인가 이사 간 후에도 얼마간 놀러오곤 했는데 그모습은 아닌것 같다.

이 사진은 고아원 시절은 아니고 이천수전도사가 있던 아래 창고 건물 앞에서 찍은 것이니 윗 사진보다는 몇년 후가 될것이다. 로이스 누이가 윗 사진에서는 중학시절이고 여기서는 숭의여고 시절이 될것이다.

이 때 신현승이도 있었을 것이고 ㅋㅋ 내 첫짝사랑 선겸이… 그리고 그 앞이 아주 낯이 읶은 아이인데 박씨가게 박찬원이에게 여동생이 잇었나??? 그리고 뒷줄 오른쪽 아이는 성애원이 헐리고 교회만 남은 주변에는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바로 교회 앞주택 딸 부잣집 중 하나같다. 나보다 한두살정도 어린??..

이천수전도사도 떠나고…

현승이가 이끌던 학생회도 떠난 후…

한 2해정도는 내가 추운 겨울을 홀로 지킨적이 있는데 어느 크리스마스인가에는 저 여아와 늦게까지 난로에 불을 피으며 지낸기억이 있다.

그전 여름에 언니가 수영을 가서 사고를 당했나…

얼굴은 분명한것 같다… 오래전이다..

숭의침례교회 간판이 선명하다.

지금의 제물포감리교회에 기증되어 이곳에 근사한 벽돌건물이 서있다.

종탑이 있는것을 보면 이천수전도사가 떠난 후이다.

저 것은 이천수전도사가 떠난 직후 학생회도 가기로 결정하기 전에 학생회원들이 힘을 합해 그 무거운 종을 종각안으로 들어올려 달았다.

그날 처음으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짜장면을 먹었다.

그 짜장면을 사준 목사는 그리고 얼마되지 아니하여 어디 부평쪽인가로 떠났다.

종각은 고아원 시절 지독한 침례교인이었던 오마니가 언젠가는 세우리라는 믿음으로 어디서 사온 것이다.

아직도 많은 아해들이 남아서 노는 모습이 너무 평화스럽다.

최강 인천 숭의침례교회 주일학교-황일지선생님 1960년대말

최강 인천 숭의침례교회 주일학교-황일지선생님

인천숭의동20번지-성애원숭의침례pic

2020-08-04 18:05:36


68년인가???

김갑수목사님의 장남 용선이가 있는것 보면

서울 수도침례신학이 얼마간 내려와 있던 때이다.

고추자전도사님과 황중호선생님이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이때는 내 위의 아이들은 이미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장경순전도사와 이정님이와 정님이 옆이 만순이로 생각되었지만 만순이는 이보다 더 어렸을 것이다.

다 아는 아해들이지만 이름은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성명중목사가 용선이 앞에 훤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리게 생겼을것 같은데 이제보니 연설자처럼 훤한 얼굴에 빛이 난다. ㅎㅎ

좌측에 어깨동무한 꼬마중에 큰애가 어른 자전거를 몰고 다니던 콩나물집 막내인지 얼굴은 익은데 가물거린다.

그러고 보니 명중이 앞줄 왼쪽 한 아이가 경순이 동생일것 같다.

어째서 기억을 못하고 잇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순이에게는 쌍둥이 어린 남자 동생들이 잇었고 그 밑인지 위인지 여아가 하나 더 있었던것 같다.

생각을 못하다보니 경순이를 만났을 때도 그 동생에 대해 물어본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사진을 정말 50년 만에 보면서 저 아이는 경순이 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순이 위의 천사같던 언니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모자같은 것들을 왜 쓰고 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아마도 숭의국민학교는 원하는 사람들은 저런 일제순사같은 모자를 쓰도록햇던것 같다.

내 위로는 아무도 없던 시절이여서 인지 쑥스러워서 인지 누구 모자를 빌려 인상을 쓰며 장난을 치고 잇다 천박하게 ㅋㅋㅋㅋ

앞에 그래도 귀티나게 생긴 여아가 만주에서 오신 유집사님 딸이다…

이름이 2개 였는데… 얼마전 까지 기억을 하고 잇었는데.. 똑똑해서 어디 이대 영문과를 다녔다고 한것 같고

오빠 용빈 동생 정빈이는 찾을 수 없다. 

지금도 만나면 같이 뭔 아이들 놀이를 하면서 놀수 잇을것 같은 아이들…

특히 여아들은 산구번지에 오래 산아이들이어서 아직도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교회들도 아이들 구경하기가 힘든데 저정도로 주일하교 학생들이 많았다니 정말 대단하다.

황중호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함이라 하면 인숙이와 인선 자매를 말할것 같은데 동생 인선이는 4학년때인가 이사 간 후에도 얼마간 놀러오곤 했는데 그모습은 아닌것 같다.

이 사진은 고아원 시절은 아니고 이천수전도사가 있던 아래 창고 건물 앞에서 찍은 것이니 윗 사진보다는 몇년 후가 될것이다. 로이스 누이가 윗 사진에서는 중학시절이고 여기서는 숭의여고 시절이 될것이다.

이 때 신현승이도 있었을 것이고 ㅋㅋ 내 첫짝사랑 선겸이… 그리고 그 앞이 아주 낯이 읶은 아이인데 박씨가게 박찬원이에게 여동생이 잇었나??? 그리고 뒷줄 오른쪽 아이는 성애원이 헐리고 교회만 남은 주변에는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바로 교회 앞주택 딸 부잣집 중 하나같다. 나보다 한두살정도 어린??..

이천수전도사도 떠나고…

현승이가 이끌던 학생회도 떠난 후…

한 2해정도는 내가 추운 겨울을 홀로 지킨적이 있는데 어느 크리스마스인가에는 저 여아와 늦게까지 난로에 불을 피으며 지낸기억이 있다.

그전 여름에 언니가 수영을 가서 사고를 당했나…

얼굴은 분명한것 같다… 오래전이다..

숭의침례교회 간판이 선명하다.

지금의 제물포감리교회에 기증되어 이곳에 근사한 벽돌건물이 서있다.

종탑이 있는것을 보면 이천수전도사가 떠난 후이다.

저 것은 이천수전도사가 떠난 직후 학생회도 가기로 결정하기 전에 학생회원들이 힘을 합해 그 무거운 종을 종각안으로 들어올려 달았다.

그날 처음으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짜장면을 먹었다.

그 짜장면을 사준 목사는 그리고 얼마되지 아니하여 어디 부평쪽인가로 떠났다.

종각은 고아원 시절 지독한 침례교인이었던 오마니가 언젠가는 세우리라는 믿음으로 어디서 사온 것이다.

아직도 많은 아해들이 남아서 노는 모습이 너무 평화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