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쫑히와 정인숙 그리고 워싱톤 한인회장 노진환 170905

빡쫑히와 정인숙 그리고 워싱톤 한인회장 노진환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5 11:52:59


▶ ‘이제는 말할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3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노진환의 삼선개헌 지지광고 

미 당국은 통일교와 한국 중앙정보부의 유착관계에 주목했다. 또 수지 박을 KCIA가 미 의회에 위장 침투시킨 여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한미관계의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역이었다. 그리고 워싱턴한인회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던 노진환과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이던 존 E. 니데커(Nidecker)가 조연을 맡았다. 
사건은 노진환(魯璡煥)의 원맨쇼로 시작됐다. 1928년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한 노진환은 1968년부터 ‘워싱톤재류한인회’(현 워싱턴한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인회장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국의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속셈으로 보였다. 
1969년 워싱턴 한인사회는 깜짝 놀랐다. 서울의 한국, 동아,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에 ‘호소문, 박정희 대통령 7.25 성명을 지지하면서’란 광고가 실린 것이다. 광고를 낸 주인공은 바로 ‘재미 워싱톤 교포회장 노진환’이었다. 
당시 한인사회는 3선 개헌 반대시위로 뜨거울 때였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는 노진환의 3선 개헌 지지 광고에 한인들은 격분했다. 

노진환이 한국의 신문에 낸 호소문.


노진환의 샌프란시스코 1인 시위 

노진환의 친정부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다. 박 대통령이 머물던 호텔 앞에 노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팻말을 들고 개헌 지지 1인 시위를 벌였다. 교포사회를 대표한 것처럼 워싱턴 한인회장이 친정부 시위를 한 것이다. 
그 장면을 박종규 경호실장이 목격하고 노진환을 불렀다.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혼자 시위를 하느냐?”

“저는 워싱턴 교포회장으로 홀리데이 인 호텔 미국 총 지배인을 하고 있으며~.” 
물론 노진환이 워싱턴 지역에서 홀리데이 인 호텔 매니저를 한 것은 맞지만 한 호텔이었지 전국 지배인은 아니었다. 
65년 내가 워싱턴 유학생회 회장을 할 때다. 8.15 광복절 경축행사를 노진환이 매니저로 있던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김현철 주미대사는 물론 6.25전쟁을 겪은 무초 전 주한 초대 미 대사, 그리고 미국인들과 유학생, 교포들이 참석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를 알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워싱턴에 머물다 귀국해 살해당한 정인숙.


그의 과장된 자기 선전을 박종규는 귀가 솔깃해 들었다. 박종규에게 노는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대단한 인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교포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인회장이 샌프란시스코 호텔 앞에 나타나 지지 시위를 벌이니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박종규는 경호실 자금을 그에게 주며 대미 로비 역할을 비밀스럽게 맡겼다. 그렇게 노진환은 박 정권의 권력 실세이던 박종규와 줄이 닿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노진환을 용서하지 않았다. 8월30일 한인회 임시총회가 소집돼 호소문 게재 경위를 조사하고 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노는 한인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무렵 우연히 DC의 어느 백화점에서 노를 만났다. 저 멀리서 노진환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노에 대한 평판이 워낙 나빠 인사를 하기 싫어 못 본 체 했다. 그런데 그 옆의 여인이 눈길을 끌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 있나” 할 정도도 발군의 미녀였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노진환이처럼 별로인 위인이 어떻게 저처럼 예쁜 여자를 데리고 다니지?” 
얼마 뒤 신문에서 그녀의 사진을 봤다. 마포 강변에서 죽은 정인숙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여인이 백화점의 그 여자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인숙은 노진환이 69년 10월경 워싱턴에서 잠시 데리고 있었다. 정인숙은 뉴욕으로 간 후 한국에 들어갔다 변을 당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와 니데커 특보 

얼마 후 노진환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대하던 권력의 세계로 다가간 것이다. 노는 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29번으로 출마했으나 당선권 밖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72년 1월 황종률 의원이 사망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했다. 
73년에는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발탁됐고 76년 다시 유정회 의원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의 든든한 배경은 박종규 실장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워싱턴 출신인데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국회의원 노진환의 또 다른 힘이 되었다. 기독교도 그는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노와 여러 한국 국회의원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노진환은 이 행사에서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던 니데커를 만났다. 그는 69년 5월부터 백악관에서 의회 연락과 학생들이나 종교단체와 관련된 연락 및 재정지원을 담당했으며 조찬기도회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노는 이 백악관 참모를 만나 천부적인 사교술을 발휘했다. 니데커의 환심을 산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조찬기도회에 그를 초청했다. 

박종규가 준 봉투 

1974년 4월 29일 니데커와 백악관 고문 목사인 클립턴 로빈슨 목사 등은 한국을 찾았다. 백악관 특보를 맞은 한국은 대통령 급에 준하는 예우를 하며 그를 환대했다. 호화스런 호텔이 제공되고 박종규의 경호실 요원들이 그를 모시고 다녔다. 
박종규의 주선으로 박 대통령도 면담했다. 박 실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니데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거기에는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라 적혀 있었다. 백악관 참모가 졸지에 한국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 된 것이다. 

안내는 노의 몫이었다. 그는 니데커가 머문 호텔 스위트룸 바로 옆에 묵었다. 
니데커가 귀국할 때였다. 노진환이 그를 청와대로 데려 갔다. 박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박 대통령은 없었다. 박종규와 골프를 치러 나간 것이었다. 

공항으로 가려는 그에게 박종규의 부하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박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뭔가 싶어 봉투를 살짝 뜯어보았다. 
현금이 보이자 그는 깜짝 놀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주한 미 대사관 직원에게 봉투를 전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투 안에는 1만 달러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백악관 참모를 한국에 데려오면서 노진환의 주가는 올라갔다.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 

한참 후 노진환은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백악관을 방문해 니데커를 만난 그는 은밀하면서도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당신들 연방의원 선거 치르는데 한국에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하원의원 출마자에게는 3천-5천 달러, 상원의원에는 1만-3만 달러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주면 좋을지 추천을 해주세요.”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에 니데커는 귀를 의심했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국회의원이 미국 선거에 돈을 대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와서 말이다.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외국인도 선거자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다만 외국 정부의 자금은 불법이었다. 나중에 박동선도 미 의원들에 준 자금을 한국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제공한 것이라고 말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니데커는 단박에 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노진환을 밖으로 쫓아냈다. 

내 후임이던 박종규와의 인연 

몇 년 후 미국 신문에 폭로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가 미 의원 선거에까지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에 미국민은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불법적 행태에 대한 보도들이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 한국의 이미지는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박종규는 워싱턴 포스트에 반박문을 기고했다. 

“니데커가 나를 만나자고 해서 잠깐 만난 것 밖에는 없다. 돈을 준 적도 없다.”
박은 니데커와의 만남이 별 것 아니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관련설을 부인했다. 
니데커는 78년 6월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박종규는 사실 나의 군 동료였다. 유재흥 장군이 육군참모차장으로 있을 때 내가 부관을 3년간 지낸 적이 있다. 당시 박종규 소령은 유 장군 집무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게다가 내 후임으로 박종규가 부임했다. 그는 괄괄하고 단순한 성격이었지만 나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 올 때 유일하게 송별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5.16 당시 박종규(왼쪽)와 박정희.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후 박종규가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 근교인 알링턴의 한 호텔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옆에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바로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노진환이었다.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마치 박종규의 부관처럼 앉지도 못하고 옆에 시립해 있었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그가 워싱턴을 다녀간 후 코리아 게이트가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 

2017 적폐청산 170906

2017 적폐청산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6 05:15:29

푸하하핫 적폐청산!!! 약 40년전 전대갈이 등장했을 때 지방 고등학교에서는 이상한 짓들을 했지!!!

1주일에 한번 하는 학급회의 시간에 처음 얼마간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들을 토의하라는 상부명령이 전달 되었지. 그리고 얼마후에는 이제 부정적인 것은 다 없어졌으니?? 긍정적인 것들만 토의 하라는 것!!!

전 나라적으로 이런 일들이 행해졌는데도 이런 것에 대해 일언반구하는 교육자들은 아직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잊었다 하겠지.

당시 누이가 서울의 한 명문여고에서 오랜동안 선생을 하고 잇었는데 그일에 대해 물어보니 서울에서는 그런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서울시에는 속해 있지 않았지만 서울 아이들도 많았을 정도로 서울과 가까운 메트로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또 우리 선생들은 반상회에 파견 되었는데 깜짝 놀란것은 주민들은 모두 우리가 무슨 정부의 정보기관에서 나왔다고 믿고 있었지.

내가 근무하던 서울 근교 유명 교육재단의 야간 경비는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와 자격증이 없는 조교들과 한 조를 이루는데 학교재단의 철칙처럼 여겨졌던 야간숙직(이말도 정말 40년만에 써보는 것같다 ㅋㅋ)도 반상회에 나가는 날에는 제외 되었지.

유명 학교재단이라도 실제 교사 자격증을 가진 선생들이 별로 없었을 테니…ㅋㅋ

하여간, 상부?명령으로 반상회라는 델 첨 나가 보니…

뭔 하수도공사 같은 것으로 다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내가 ‘정부에서 나오신 분’ 자기네 편인냥 언급하면서들 싸우고 있었지…

에고 독재가 문제가 아니고 이기심과 우둔한 궁민들이 더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ㅋㅋ

모두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 사이비덜 정치의 후유증이긴 하지만…

사실 그 다음 반상회에는 내 끓는 피를 따라 죽마고우 명석이랑 뭔 흑인 노예 영화 ‘호딩고?’ 인가 뭔가 하는 영화를 보러 갔지…

살벌한 전 대갈통 시대인데… ㅋㅋ 그때 아마 들통 났으면 미운오리 였던 나를 분명 학교재단은 신고를 하고 곡정원에 끌려가서 희생양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사 아무도 모르는 채 영화가 끝난 후, 나는 학교로 돌아와서 야간숙직을 햇지…ㅋㅋ

그러고 보니 40년 묵은 극비가 공개 됐넹 ㅋㅋ

혹시 이제라도 곡정원에서 잡으로 오지 않을까???ㅋㅋㅋ

퀘이커 평화운동 주의자 엘리스 보올딩 여사 170906

퀘이커 평화운동 주의자 엘리스 보올딩 여사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6 13:16:40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 엘리스 보올딩 여사가 우리 앞에 나타난것은 왠일인가??

1990년 미국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ee 에 의해서 Nobel Peace Prize 후보에 추천되었으나 노벨상을 타지는 못했다.

1991년에는 우리 남침례교의 자랑이신 카터 대통령이 후보에 올랐다.

The Spirit of Ma’at, Volume 1 No. 5 “The Futurists Creating Peace”

Peace: The Untold Story

with Dr. Elise Boulding
by Susan Barber

Elise Boulding, PhD has been an important peace activist since World War II. Author of eleven books (see book list) and contributor to many more, she built the Peace Studies program at Dartmouth College, and both she and her husband, Dr. Kenneth Boulding, were active all their lives in conflict-resolution studies and in the more important groups that have been working for world peace. Although she has been retired for some time, and was widowed in 1993, Elise Boulding spent the mid-nineties writing Cultures of Peace: The Hidden Side of History (see Source Books). And she still makes her peaceful presence felt in the corridors of power.

We called Elise Boulding at her home in Massachusetts, near Boston, in order to learn about peace efforts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to gain her experienced perspective on where the world is tending now. But perhaps even more importantly, we wanted to paint for our readers a portrait of one woman’s life dedicated to creating a world in which children might feel safe.

No Safe Place on Earth

The course of Dr. Boulding’s adult life grew out of a childhood perception. “I was born in Norway in 1920,” she said, “and we came to this country when I was three. My early memories were of war movies, and Mom being homesick for Norway.” As a little girl, Elise was frightened by the images of war, so she decided on a plan. If war broke out again, she would return to Norway. The peaceful homeland for which her mother longed. Where she knew she would be safe.

“Then came World War II,” she said, “and the invasion of Norway. And that was when I realized that there was no safe place on earth. And I knew that I had found my life’s mission.”

Like all of the thousands, perhaps hundreds of thousands, of peace-people who are truly making a difference, Dr. Boulding has primarily focused on what’s right with the world, not on what’s wrong with it. Rather than opposing war, she has studied what can be done to prevent it – how to resolve conflicts without fighting.

“We Had No Sense of Strategy”

During and after WWII, Elise Boulding began to become involved in various efforts to bring an end to all wars. She became a Quaker, and she and some of her fellow “witnesses against war” wrote what she calls a ”seditious public letter.” The letter simply said that we should not be in the war, that people should just lay down their arms. ”We had no sense of strategy. And we expected to go to jail. But nobody paid any attention to us.”

Soon, marriage and five children captured most of her time, but she remained active during her childbearing years, teaching peace to children and participating in activist projects of the fifties. She also joined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 and started a newsletter to unite women in behalf of world peace.

”When we went to Japan for a year, from 1963 to 1964, my kids were in school – they used to walk to school through the rice fields. I had some time, so I decided to find out how things work. In those days, Japanese women were demonstrating in the streets.”

But the research she sought to undertake needed resources, and she could not obtain them with her master’s degree. So upon returning to the states, she took a PhD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Then I could get funds. It made a ridiculous amount of difference,” she said.

The Dartmouth Years

She was in the Sociology Department at the University of Colorado when Dartmouth College invited both Elise and her husband, Kenneth, to become Scholars in Residence. This program offered room and board plus a stipend; all they had to do was spend the year talking to students and faculty.

Although Kenneth eventually returned to Michigan because of the research staff he had there, Elise Boulding remained behind at Dartmouth, where she chaired the Sociology Department and developed the college’s Peace Studies program. ”We had a long-distance marriage,” she said. ”And we were both traveling so much, we were just as likely to run into each other in some foreign city as anywhere else.”

”Some . . . Have Lost Their Husbands
and Children to Each Other’s Men”

When asked what she felt was the most important thing to creating world peace, Dr. Boulding answered without hesitation. ”We need more women in decision-making positions, both in government and in the public sphere.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Dr. Boulding talked of an Africa-wide peace council, an offshoot of the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Reconciliation, that includes groups of women in every country in Africa. ”These women are always in contact with each other,” she said. ”Some of them are being trained to work with the elders, to point out to them the ways that exist already in their traditions to resolve conflicts in a peaceful way.

”They are saying to the elders, ‘We have to sit down in a circle and talk.’ These are ways that the men have always known and have forgotten. Some of these women have lost their husbands and children to each other’s men. Yet they come together, to share, and to strengthen each other.” Wherever there is genocidal conflict in Africa, Dr. Boulding said, these women are there, too, trying to end it.

”The Women’s Movement has worked hard, but other countries are way ahead of us,” Dr. Boulding says. ”And it’s been proved in all peace organizations that when women are in a coordinating role, it works better. I don’t think this is a genetic thing. It’s cultural. Partly, I think, it’s because women’s culture involves a lot of listening.”

”There is a generation of women who are full professionals coming into conflict resolution,” Dr. Boulding said. ”This new cadre of women can change the direction of how we handle conflict. We’re learning to create the governing structures that would make disarmament possible.”

A hopeful thing that’s happened recently, Dr. Boulding said, is that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has finally acted upon the knowledge that women are more effective than men at this peacemaking business. ”After years of effort trying to make this happen, the U.N. have finally made it an official policy to have women on all peace projects,” she said (see U.N. Resolution 1325: A New Landmark Initiative for World Peace).

The Back-and-Forth People

The second most important thing to improving efforts at peace, according to Dr. Boulding, is for us to become aware of the sheer size of the peace effort that is happening in today’s world. If we knew what was actually happening – how many thousands of individuals and groups were working to create peace – this in itself, she feels, would change world consciousness.

And the peace-seekers do not have an easy job. one of the big stumbling blocks, she said, is that representatives to the United Nations and other bodies do not usually have the power to sign agreements. ”Every little change requires an intensive process, back and forth. The representative goes home or across town and talks to his own country’s officials, then returns to the conference table, then it’s back to his own people, and back to the conference table, on and on.”

Dr. Boulding paints us a vivid picture of the huge cadre of dedicated civil servants spending their lives in taxis, on buses and airplanes, or walking – from country to country, city to city, hotel to hotel, room to room – all trying to bring peace to our planet.

”The only reason any positive change ever comes about is because of these thousands of people, going back and forth, back and forth. And the only way they can do this is that they have a Vision.”

This, Then, Is the Untold Story

Until we ourselves at the Spirit of Ma’at began to research the world’s efforts to create peace, we had no inkling of the sheer size of the peace movement. The subject of peace has become bigger than the subject of war – the reason it doesn’t seem so is that it’s not reported in the media.

The great, untold story of the peace movement is how many people and organizations are involved in it. Not only people, but newsletters, conferences, councils, committees, elderly groups, youth groups, celebrities, art, music, websites. The untold story is the sheer weight of the numbers of those who have the vision of a world without war.

What we need, Elise Boulding insists, is more awareness of what’s going on. Identify the players. Realize the expenditures of energy.

Give them energy, she urges.
Pray for them.
Know that they exist.
And if it’s yours to do —
become one of them.
Dr. Boulding concluded by describing a Buddhist worship service that she attended during the holidays. ”I could see the whole room – several thousand people. And I was thinking, ‘These are my neighbors, and I never see them.’ We were chanting together, lifted in the Spirit together, to a new place.

”I remember reading in the New York Times about biomusic – how human beings did not invent music, every living thing makes music.

”I love to think,” she said, ”of all the world singing. Every living thing.”

Books by Elise Boulding, PhD:

The Future: Images & Prophecies, Sage Publications, Incorporated(1994) [with Kenneth Boulding]; One Small Plot of Heaven: Reflections on Family Life by a Quaker Sociologist, Pendle Hill Publications(1993); New Agendas for Peace Research: Conflict & Security Reexamined, Rienner, Lynne Publishers, Incorporated(1992); Building a Global Civic Culture: Education for an Independent World, Syracuse University Press(1990), Peace & Conflict Resolution (Paperback) Series; Women: The Fifth World, Foreign Policy Association(1980), Headline Series; Children’s Rights & the Wheel of Life, Transaction Publishers(1980); The Family As a Way into the Future, Pendle Hill Publications(1978); The Underside of History: A View of Women Through Time, Sage Publications, Incorporated(1992), Westview Press(1976), Westview Press(1977); Born Remembering, Pendle Hill Publications(1975); Children & Solitude, Pendle Hill Publications(1962).

150130 뉴욕 원로목사 이순옥사모(이창송원로목사) 소천 – 연길 용정침례교회

150130 뉴욕 원로목사 이순옥사모(이창송원로목사) 소천 – 연길 용정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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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2 05:38:13

전화가 바뀌고 지난 몇년간 살다가? 보니 뉴욕에, 그래도 해마다 한번은 인사를 드리고 살아오던 우리 침례교회의 원로이신 이창송목사님 사모님이 2015년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떠있다.

모르고 있었는데 사모님께서는 우리 고향 연길 근처 시인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 출신이다.

충청도 출신인 목사님과 1940년도에 결혼하셨다고 하니 목사님도 연길에 살았거나 내가 충청도 출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하고 가깝게 지내셨던 그런 이유가 있었던 같다.

국민학교 5-6년 때인가 김신조 124부대가 청와대에 쳐들어온 1.21 사태 때 뭔일로 새벽에 우리가 살던 인천 숭의동에 오셔서 서울에 난리가 났다고 소식을 전해 주셨다.

사모님이 섬기셨다는 연길 용정교회에서 순교하신 침례교 김영관 4대감목(총회장)의 형님 김영국감로(장로)는 우리 고모님의 시부이시다. 고모는 김중길, 김중헌 형님들을 29에 홀로 되어 키우시고 그 손주 6을 떡장사와 농사로 키우셨다. 손주들은 북경대, 남경대, 하르빈대등 중국 최고 명문대들을 나와 모두 잘 살고 있다. 일송정 밑 혜란강가의 용정동에서도 대학을 모두 나온 집은 별로 없다는데… 모두 돌아가셨지만 둘째 중헌형은 할아버지 형제가 순교하신 고향교회를 끝까지 지키시고 이제는 홀로되신 형수가 교회를 지키고 있다.

아우러, 이창송 원로 목사님의 차남 이선일목사도 작년 2016년 10월 14일 54세(1953,1,13)에 소천했다는 소식도 올라와 있다.

<이순옥 사모 소천>

뉴욕안디옥교회 이순옥 사모(이창송 협동목사)가 지난 1월 30일 오전 8시 향년 91세로 지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 이순옥 사모는 1923년 5월 21일 중국 간도성에서 출생해 1940년 12월 18일 이창송 목사와 결혼하고 1987년 11월 30일 도미, 목회자의 사모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던 중 지난 1월 3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 이순옥 사모의 큰 아버지되는 손상렬 목사는 1921년 만주의 서간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제헌병에 순교를 당했고, 오빠 손창옥 집사는 관도구 교회에서 교인들을 대표하여 갖은 고문과 투옥을 당했으며, 모태부터 믿음생활을 하며 침례를 받았던 만주의 종성동교회에서는 1932년 김영국 감노와 김영진 목사 형제분이 공산당에 의해 온 몸의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며 장렬히 순교하는 말 그대로 피흘린발자취를 걸어온 신앙의 족적을 남겼다.

장지는 미국 롱아일랜드 파밍데일의 파인론 메모리얼 파크이며, 유가족으로는 현재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인 이선일 목사 외 1남 3녀 내외가 있다.

박정희의 현충사 현판 떼라-충무공 후손 170914

박정희의 현충사 현판 떼라!!! 충무공 후손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14 07:56:37

일제가 박은 대못은 뽑는다고 난리를 치면서 친일독재자가 충무공을 희롱하고 개구덜이 각종 단체를 만들어서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을 희롱하고 심지어는 각 독립투사 유공자 후원단체라고 만들어서 희롱하는데도 좋다는 궁민덜… 그들이 민족정신을 희롱할때는 항상 ‘빨갱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쒸웠지!!!! 그래도 좋단다!!! 에고 그나저나 빡쫑히가 충무공 뒤뜰에 심었다는 그 일본 금송은 아직도 잘있나?? 에고….

러시아 내무부 사할린에서온 김새협의사의 흔적 – 그이름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170926

러시아 내무부 사할린에서온 김새협의사의 흔적 – 그 이름.
독립투사 전홍섭과 김새협 pic2

2017-09-26 04:01:23

드디어, 아직도 한국에서 그 생년월일을 적지 못하고 하고 있는 독립투사(애족장) 백부 김새협의 이름이 러시아 관공서에서부터 왔다.

오마니가 보관하고 있던 오직 한장의 사진 뒤면에 적혀 있던 이름과 말들의 정체? 가 밝혀진다.

Ким Са Хеби,или Ким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или Ким Кван Нюк,или Ким Гван Нюк.

-김 사 헤비, 혹은 김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 혹은 김 꽌 뉵 , 혹은 김 관 뉵

백부는 김새협, 옥새 새자를 쓰셨다. 하지만 그 옛날 새를 사라 읽었는지 우리는 사협이라 읽었다.

오마니가 남기신 부모형제이름도 분명히 한문으로 옥새 새를 쓰시고 ‘사협’이라 되어있다.

하여간 외조모가 1925년 러시아 사할린으로 부터 받았을 것 같은 사진에 ‘득용’ ‘광뉵’이라는 단어들이 있다.

득용은 분명 아들을 얻었다는 뜻일진데 1924년경 망명당시 이미 회령에 태어나있던 사촌형 동산이 오마니와 같은 1915년 생이니 그 형이 태어났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또 망명후 다른 아들을 두었다는 말이 없었으니 다른 아들을 두었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사진 뒤에 ‘광뉵’이라는 이름이 무엇인가 하였는데…

이모 할머니, 전홍섭의사(독립장, 단장) 부인의 이름이 함홍숙인데 보통 미국에서도 그렇듯이 이름중 한자를 택해서 이름으로 사용해 함 슉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성 ‘함’이 kham 캄이 되듯이 불어, 라틴 혹은 슬라브어에서 r이나 우리 ㅎ발음을 흨… 가래를 끓게 하는 식으로 발음하다 보니 이름이 이상해 진다.

해서 사진 뒤면의 ‘광뉵’이 이모할머니 ‘홍숙’이 공슉으로 또 광슉으로 그리고 끝내는 광뉵으로 쓰여진건가 하는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러시아 내무부에서 온이름을 보면 분명,

독립투사 김새협은 러시아 망명후

본명 김사헤비, 그리고 러시아 이름 니꼴라이 이와노비치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1925년 러시아 망명 직후에 이미 새로운 한국 이름 ‘김광육’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음을 알수 있다.

아직도, 뽀훈처나 한국 역사에 그 졸명의 년도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독립투사 전홍섭(독립장)과 김새협(애족장) 의사들의 역사가 제대로 적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아래 내용을 보니 러시아로 쓴글이 김싸헵, 김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혹은 김관뉵혹은 김광뉵

도대체 러시아 기관에 내가 러시아어로 말할수 없으니 어째야 되는지

오늘 보훈처에 전화했는데 작은할아버지 유공자 후손 등록신청시 나하고 친척관계라는것을 국정원 조사당시 다 이야기했다고 해서

보훈처에서 국정원에 공문을 보내서 확인하였는데 그때당시 받은 서류를 러시아 이네사한테 물어보고 해당기관에 전달해 달라고 하니

영사관에 보내여서 연락하게 하겠다고 하였어요…

그리고 이네사한테도 물어보겟다고 하여 전화번호를 알려주엇구요…

하여튼 백부님 행적을 찾았으니 너무 기쁘고 눈물이 나네요..

할머니가 세상뜨기전에 큰아들을 그리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할머니 생각도 많이 나구요…

아래 내용의 큰글은 내가 본내용의 글을 번역한것입니다.

그리고 그아래 내용은 조이아빠가 작년에 이네사한테 보낸내용에 답장글을 단것 같아요..

조이아빠 건강은 어떠한지..

헤모힘은 잘 드시고 있는지,,,

아프지 말고 건강하길 바라면서…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Инесса К. mai1999@list.ru
받는사람: 망향나루 lsy7739@hanmail.net
날짜: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20시 37분 48초 +0900

1.당신은 내무부 내무부 사할린 주 알렉산드로 프 스크에 연락해야합니다.

이 주소에서 이름 요청을 시도하십시오.

-Ким Са Хеби,или Ким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или Ким Кван Нюк,или Ким Гван Нюк.
-김 사 헤비, 혹은 김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 혹은 김 꽌 뉵 , 혹은 김 관 뉵

러시아어는 받침 을 그대로 표현할수 없으니 꽌, 관으로 발음할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분명한 백부님 이름입니다.

그리고 내 블로그에 있는 백부님 사진뒤면에 있는글에 광뉵이란 글이 있지요..당시 누구일가 했던 내용이 해명된것이라고 봐요

내가 당신에게 쓴 것처럼, 이름이 러시아어로 보내집니다.제


  1. 우편 주소 : Sakhalin Oblast, Alexandrovsk-Sakhalinsky시, 694420, ul. 소비에트, 7. 내각

전자 메일 : archive-aleksandrovsk@mail.ru

기록 소장 – Novikova Ekaterina Ivanovna

최고의 전문가 – Lyubov Anatolievna Savchenko

시민의 리셉션 : 월요일, 수요일 9-00부터 17-00 (점심 시간 13-00에서 14-00까지)

영구 보존 기한의 문서 보관 – 내선 번호 226
전화 번호 : 4-23-55
인력을위한 아카이브 – room № 2
전화 : 4-25-55 (리셉션을 통한 연결)

3.

Среда, 20 сентября 2017, 20:50 +10:00 от Инесса К. mai1999@list.ru:

안녕하세요 광휘언니 나는 정확한 번역이 어떻게되었는지를 모른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 수있다.

Среда, 15 июня 2016, 17:00 +10:00 от “망향나루” lsy7739@hanmail.net:

미국 다비드한테서 온 메일 내용임

이걸보고 다비드오빠에게 연락줘요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David Kim dbyokk@gmail.com
받는사람: 망향나루 lsy7739@hanmail.net
날짜: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06시 07분 39초 +0900
제목: Fwd: United Airlines Schedule Change Notification for reservation MX05GR

한국으로 돌아갈때 시간이 바뀠다고 연락이 왔네요. 참고로 갖고 계시고 러시아 이네사와 연락이 없네요.

페이스북에도 없어진것 같고 여기로 이메일 좀 달라고 해 주세요. 아니면 갈리나에게 이야기 해주던지요…

170927 개같은 대한민국의 뽀훈처 답신

170927 개같은 대한민국의 뽀훈처 답신
독립투사 전홍섭과 김새협 pic2

2017-09-29 02:56:52

안녕하십니까 서울에 사는 올해 71살인 김광휘라는 탈북여성입니다. 이렇게 오늘 보훈처에 또 글을 올리게 됨은 제가 탈북하여 02년에 한국에 와서 저의 백부님사적을 찾기위한 노력을 한지 십여년이 넘어서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는데 반드시 보훈처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 8.15 광복절 경축행사에 해외에 있는 독립유공자후손들이 초청되어 온 그 중에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있는 전홍섭의 손녀 강이네사가저한테는 6촌동생 왔댔습니다. 물론 전홍섭 작은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등록되고. 그 후손으로 인정되어서 국가에서 보상금을 받을수 있도록 노력한것은 한국에서 제가 미국에 있는 고모사촌동생과 KBS PD 류지열님 노력으로 이미 1963년에 등록된 유공자 가족이 30여년이 지나서야 그 후손으로 등록되었지요. 아마도 내가 한국으로 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러시아고모네는 이런내용을 모르는채 살아가고 있을겁니다. 고모님은 어버지의 명예가 회복된것을 대단히 감사해 하면서, 대한민국정부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저의 백부님이신 김사협의사도 한국독립기념관에 그 이름이 올라있고 대통령표창장, 애족장 훈장을 수여되었지만 후손을 찾지못하고 그냥 보존되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전홍섭 작은 할아버지의 가족과는 북한에 있을때부터 제가 항상 작은할머니와 편지를 주고 받았기에 그 가족을 찾을수 있었지만 정작 백부님에 대한 소식은 작은할머니에게 물어보아도 이 이모가 조카를 찾기위해 조카김사협가 근무하던 곳에 찾아가도 사람들이 다 바뀌워지고,,모두 물어보아도 모른다니 알수가 없다고 답이 왔댔지요. 그러나 어떻게 하나 찾고야 말리라는 결심을하고 노력하던차에 이네사한테서 반가운 소식이 왔지요. 백부님 이름이 김사헤비 맞냐고 해서 아마도 러시아발음으론 협을 그대로 표현할수 없으니까 헤비라고 할거다라는 생각으로 맞다고 하니 또 다른이름을 대니 조금은 생소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고모가 건사하고 있던 사진을 4촌동생이 보내준거 있어서 블로그에 올린거 있는데 그사진을 보니 거기에 그 낯선이름도 있는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보훈처에 전화하여서 전홍섭 작은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 그 가족을 유공자후손으로 등록할당시 보훈처에서 상담받으면서 그분과 나하고 친척이 된다는 증명을 하라고 하여서 내가 북한서 온 사람이라 국정원 조사시 이런 내용 다 말하였다하니 그내용을 보내달라고 해서 물어보니 국정원자료를 개인한테 절대 주지 않는다고하여서 보훈처에서 공문을 띄워서 자료를 받아보고 나한테 다시 할아버지 이름부터 쭉 다 물어보는것 다 대답하니 맞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살고있는 전홍섭 작은 할아버지 가족을 찾아서 필요한 서류를 내가 여기서 보내주어 그쪽에서 고모님이 안의 내용을 다 기입해서 나한테 보내주었고, 6개월만에 결국은 그 후손으로 인정되어서 지금 국가로부터 일년에 두번 보상금을 받으면서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목적이 지금 저의 백부님의 사적을 찾는데 그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러시아측에서 나하고 김사협이하고 친척간이라는 증명을 해보내라고 합니다. 그래야 나한테 백부님에 대한 자료를 보내준다고 합니다 내가 보훈처에 전화로 물어보니 당시 국정원서 받은 공문을 개인한테는 절대 줄수 없으니 블라지보스토크에 있는 한국영사관을 통해서 해당기관에 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아직 제가 러시아 어느기관인지 몰라서 알리지못했는데 이네사 개인한테도 줄수없는 서류이기에 내가 이네사한테 러시아 어느기관에 보내줘야 되는가 알려달라고 하니 어제 메일이 왔습니다 그 메일에 있는 내용보고 보훈처에서 직접 우편이든, 메일로 공문내용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이말을 하기위해서 긴 설명을 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홍섭작은할아버지와 김시협백부님이 같이 찍은 사진을 파일로 보냅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분이 저의 백부김사협분이고 의자에 앉은분이 전홍섭분입니다. 그리고 사진뒤면을 또한 보내는데 뒤면에 적은글씨를 보면 또다른 이름이 나오는데 우리도 그 낯선이름을 어제야 해득하여서 정말 기뻤습니다. 아래에 이네사가 보낸 메일내용도 복사햇습니다. 1.당신은 내무부 내무부 사할린 주 알렉산드로 프 스크에 연락해야합니다. 이 주소에서 이름 요청을 시도하십시오. -Ким Са Хеби,или Ким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или Ким Кван Нюк,или Ким Гван Нюк. 이를 번역하면 김 사 헵 혹은 김 니꼴라이 이와노비츠 혹은 김 꽌 뉵 혹은 김 관 뉵 내가 당신에게 쓴 것처럼, 이름이 러시아어로 보내집니다. 2. 우편 주소 : Sakhalin Oblast, Alexandrovsk-Sakhalinsky시, 694420, ul. 소비에트, 7. 내각 전자 메일 : archive-aleksandrovsk@mail.ru 기록 소장 – Novikova Ekaterina Ivanovna 최고의 전문가 – Lyubov Anatolievna Savchenko 시민의 리셉션 : 월요일, 수요일 9-00부터 17-00 점심 시간 13-00에서 14-00까지 영구 보존 기한의 문서 보관 – 내선 번호 226 전화 번호 : 4-23-55 인력을위한 아카이브 – room № 2 전화 : 4-25-55 리셉션을 통한 연결 이상 이네사의 메일내용인데 여기보면 주소도 있고, 메일주소도 있으니 메일로 꼭 공문내용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답장을 기다리겟습니다. 감사합니다.
bullet답변내용담당부서 : 공훈발굴과 | 담당자 :박민석 | 답변완료날짜: 2017-09-25
제 목 민원회신(처장과의 대화)
내 용

  1. 안녕하십니까? 귀하께서 국가보훈처에 처장과의 대화에 제출하신 민원에 대한 검토결과를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2. 귀하께서는 “독립유공자 김새협(’90. 애족장)선생의 후손 확인” 을 요청하셨습니다.
  3. 귀하께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김새협 선생이 귀하의 백부라고 주장하시면서 김새협 선생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2017년 광복절 기념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에 참석했던 전아브로라(’63. 독립장, 전홍섭의 자녀)를 통하여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4. 이에 따라 러시아에 거주하는 전아브로라(+1-421-227-5244)선생님에게 연락하여 김새협 선생의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있는지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향후 요청한 자료가 도착하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공훈발굴과 박민석(044-202-5457, ms2589@korea.kr)에게 문의해 주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